『부디 몸조심 하거라. 네가 무사히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너를 장가보내 주고 네 앞으로 땅도 적잖이 떼어줄 생각이다. 그리고 이 집 살림을 아예 너에게 맡기고…. 그러니 네 장래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도 말아라. 조금도 딴마음을 먹지 말고 제대 후에도 계속해서 내 곁에 있어 주기 바란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느냐?』
『예、마님』
『내가 내 할 바를 다하는 것만큼 너도 네 도리를 다해야 하느리라. 내 말 명심하고、그럼 어서 가거라』
『예!』
그때 기섭은 너무도 감격스러워서 한순간은 몸이 허공에 붕 뜨는 것도 같았다. 간신히 예、소리만 하고 토방에 꿇어 엎드려 마님께 큰절을 하였다. 그의 눈에는 마루 위에 단정히 앉아 있는 흰옷 차림의 마님이 하늘에서 하강한 거룩한 신선같게만 보였다. 지난날의 그 모든 비천한 충성들과 힘겨운 노고들이 마침내 우람한 보람으로 그의 가슴에 안겨드는 것 같았다.
기섭은 자신이 없는 3년 동안 마님이 겪어야 할 여러 가지 불편함들에 생각이 미쳐서 잠시 마음이 무겁기도 하였으나 곧 힘차게 집을 나섰다. 그는 곧 오로지 기쁜 마음뿐이었다.
무사히 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면、제대 후에도 계속해서 마님을 편안히 모시고 온갖 충성을 다하리라 굳게 다짐하였다.
그는 마님이 명심하라고 했던 말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항시 큰 위안으로 삼으며 쫄병 생활을 견뎌내었다.
그리고 드디어 첫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힘차게 발걸음을 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반갑게 맞아 주는 사람이 없는 그 적막과 쓸쓸함 속에서도、그러나 계속 힘차게 걸음을 하였다.
이윽고 집 앞에 당도한 그는 집안 가득히 담겨 있는듯한 정적에 잠시 마음이 뜨악해짐을 느끼며 슬며시 문을 밀쳤다. 그리고 가만가만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채에는 낯선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타지에서 온듯한 젊은 부부였다. 그들은 기섭을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섭은 집요하게 다가들어 그들로부터 상세한 말을 들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한 애기씨가 남편의 사업자금을 댄다고 어머니를 설득하여 시골의 전답을 모두 팔아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남편의 사업이 크게 망하는 바람에 유서 깊은 고옥(古屋)마저 남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외동딸의 간청과 설득에 못 이겨 토지는 모두 팔았으며 집만은 보존하려 했던 마님은 홧병에다가 중병을 얻어 얼마 전에 서울의 병원에 입원을 한다고 떠났는데、그 뒤로 소식이 묘연하다는 것이었다. 생사조차 알 수 없고…
젊은 부부는 새 집주인에게 딸린 사람들로서 당분간 집을 지키며 살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하였다.
기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충격도 슬픔도 그 어떤 것도 그는 의식되어지지 않았다. 잠시 망연자실한 심정이었을 뿐이었다.
1년 동안에 이런 변화가 생기고 말았다니… 조금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믿지 않는다 해도 별수 없는 일이었다. 기섭은 빠른 체념 속으로 함몰해버렸다.
그리고 기섭은 젊은 부부에게 청하여 그날 밤은 그가 1년 전까지 긴 세월을 살았던 방에서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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