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죽음」은 인류에게 죽음의 새로운 의미를 제시한다. 십자가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길임을 일러주는 죽음의 긍정이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죽음에 대해선 답변할 수 없었다.
공자님도『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하고 묻는 제자 계로에게 『우리는 아직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는가?』(敢問死 日未知其生 焉知死)라고 대답했다 한다.
너무나 정직하고 겸손한 공자님의 답변이었다. 그러나 생명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절대자만은『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리라』하고 외쳤다.
인간의 죽음은 새 생명으로 가는 새 희망의 진리라는 것이 십자가의 근본 가르침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죽어야 산다』하는 것이 그 기본내용이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체험해보지 못했고 죽음이 새 생명이 된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대자연의 질서가 죽음은 새로운 긍정임을 일러주고 있다.
소금이 녹아서 죽어야 짠맛을 낼 수 있다. 자동차가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게 엔진에서 휘발유가 타서 죽어야 한다. 봄에 새싹을 얻기 위해서는 가을에 단풍이 떨어져야 한다. 소는 죽어서 인간의 음식이 되므로 진정 소의 의미가 살아있다. 한 생명을 낳는 어머니는 그 생명을 위해서 산고라는 고통을 겪어야 만이 되게 마련이다. 우리의 위장 속에서 밥알이 썩어서 죽어야지 우리의 생명이 살게 되어 있다. 대자연의 질서는 한 생명의 죽음은 더 큰 다른 생명의 긍정임을 일러주고 있다. 그렇다면 많이 살아도 백년을 못사는 인간생명의 조건이 죽음을 통해서 더 큰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여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다는, 너무나도 귀한 값진 진리를 십자가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죽어야 산다』라는 너무나도 아이러니칼한 그 진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영원한 삶의 희망으로 사는 것이 곧 크리스찬들이 믿는 신앙의 전부이다. 「삶과 죽음」은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적인 문제이다. 어느 과학자도 어느 철학자라도 여기에는 답변할 수 없다.
오직 생명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그분만이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답변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차원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긍정하는 삶이 곧 신앙의 삶이다. 그러므로 참 신앙인은 영생의 희망으로 사는 영원한 희망의 주인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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