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기섭은 이제는 자신의 방이 아니게 된 그 방안에 남아있는 자신의 과거 물품들을 모조리 꺼내다가 마당가에 놓고 불을 질렀다. 한가지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남겨놓거나 가지고 갈만한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1년 전까지 긴 세월동안 노상 함께하였던 남아 있는 잡동사니들을 모조리 불태우면서 자신의 과거도 깡그리 불태워 버리고 싶었다. 잡동사니들이 불에 타는 것을、그 불길과 산개하는 연기를 보며 자신의 모든 과거와 희망과 슬픔들이 한가지로 사라지고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정녕 그것을 염원하는 마음이었다.
아침식사를 하고 가라는 젊은 부부의 말을 뿌리치고 기섭은 집을 나왔다. 이제는 자신과 상관없는 집이었다. 그는 집을 한번 돌아봄도 없이 곧장 걸음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의 먼 시선을 느끼기도 하였으나 그는 알은 체를 하지 않았다. 곧장 마을 어귀 고개 마루를 올랐다.
그리고 기섭은 산마랑으로 올랐다. 그가 과거에 무수히 오르고 오르며 마음의 평화와 그리움과 감미로움들을 얻었던 곳이었다. 그가 진심으로 사랑했었던 정다운 장소였다. 그는 다시금 그 산마루의 그 자리에 앉아서 먼 서울 쪽 하늘과 읍내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날은 다행히도 일요일이었다. 오래 기다린 끝에 그는 드디어 읍내에서 날아오는 성당의 종소리를 들었다. 다시금 진한 그리움이 그의 가슴에 무놀졌다. 평정과 평화 속에서 감미로운 뜻 모를 그리움들이 종소리의 곁을 따라 그의 주위에 무수히 파문을 짓는 것 같았다. 순결한 꽃송이들로 끝없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오늘의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은 절실한 슬픔이었다. 다시는 이 산등성마루에 오를 수 없고 이 자리에서 그 정다운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절실한 깨달음이었다. 그는 깊은 슬픔과 적막감에 몸을 떨었다.
이윽고 종소리가 멎었을 때、기섭은 몸을 일으켰다. 무거운 걸음으로 산을 내려갔다.
읍내에서 간단히 요기를 한 기섭은 버스에 올라 그 길로 부대가 있는 D시로 향하였다. D시는 거의 천리밖이었다. 그 거리감이 그의 가슴에 더욱 큰 무게로 와 닿는 것 같았다.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으리라는、돌아올 수도 없으리라는 미묘한 생각이 천근만근의 무게로 그를 덮쳐누르는 것 같았다.
첫 휴가를 얻어가지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부대를 나왔다가 하룻만에 되돌아가는 자신의 처지가 문득 큰 슬픔으로 의식되어졌다.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새삼스러운 것이 정작 얼마나 슬픈 것인지…
휴가를 얻어 나갔다가 하룻만에 부대로 되돌아온 자신을 동료 부대원들이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지도 기섭은 두려웠다. 동료 부대원들의 의아심과 질문과 그리고 멸시와 동정… 모두가 두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각오하고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수중에 풍족한 돈도 없으니 부대 밖에서 휴가기간을 보낼 수도 없는 터、부대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었다.
기섭은 참으로 절실한 슬픔과 두려움을 가슴에 안은 채 쓸쓸히 부대로 향하였다.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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