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군국주의가 한반도 문화를 페결핵균처럼 파먹어 들어가던 때、우리 가톨릭도 탄압을 받았다. 천황이 더 높은가 그리스도가 더 높은가 하여 각 성당 제대 위에 가미다나(神棚)를 모셔라 했고 미사 시작전 동방요배(東方遙拜)와 일본국가제창을 강요했다. 성당의 종을 때어 헌납하라、신부출장땐 배정기(配程記)를 제출하고 허락을 받아라、 고해성사때 신자들이 신부들께 스파이질을 하니 신부와 신자사이에 의자를 놓고 그내용을 들어야겠다고도 했다. 마침내는「기독교 종교단체법안」까지 만들었고、1940~41년에는 일본내 외국인교구장을 교황사절을 앞장세워 일본인 교구장으로 갈아치웠다.
당시 필자는 혜화동주임으로 있다가 1939년 7월 7일 서울교구청으로 발령을 받아 교구장 원형근(Andrien Larr·beau. 「빠리」외방전교회 소속·제9대 서울교구장)주교님의 비서직을 맡게 되었다.
그때 중부경찰서 헌병대·총독부 경무대에서 교구청을 수시로 드나들었고、 전국적으로 신부들이 투옥되기도 했다. 유재옥(劉載玉)김영호(金永浩)신부가 경찰서 및 광주형무소에 구속되었고、평양교구의 미국인신부·수사들이 금족령을 받아 신의주 사제관과 평양 양촌에서 발이 묶이기도 했다. 광주 꼴룸바노회 신부들이 목포 산정동주교관에、 춘천교구 꼴룸바노회 신부들은 주교관에 금족되어서 전교조차 못하게 되었다. 일본군국주의는 지방에서부터 차츰 중앙으로 탄압을 강행해왔고 끝내는『왜 전국인 프랑스인을 교구장직에 그냥 두느냐? 교구장 자리를 일본인으로 바꿔야 한다』고 들먹여됐다. 교회도 일본인이 강점할 판이었다.
원 주교님은 사임하면 반드시 한국인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길 희망했다. 그런데 교황청에의 의사전달이 문제였다. 그리하여 필자는 원 주교님의 밀사(?)로、 한국신부들의 특사(?)로 일본에 있는 교황사절을 만나기위해 1941년 12월 20일 새벽「東京」을 향했다. 그때는 한국인이 일본엘 가려면 도선권(渡船卷)이 총독부에서 나와야 했다.
일본인교구장 후임설 때문에 교황사절을 만나러 간다고 총독부에 바로 얘길할순 없었다. 그래서 꾀를 내어 일본의 「기독교 종교단체 법안」을 사다가 조문마다 붉고 검은 줄을 그어서 중부경찰서 고동계로 가서 『이 법안을 자세히 몰라 동경 도이(土井辰雅)대주교께 질문하고 이를 연구하기 위해 출장간다』고 했다. 고동계 형사야마(秋山)가 신이 나서 필요한 서류와 도선권을 마련해 주었다.
헌데 알고보니 기가 막히게도 그가 한국인이었다. 막상 「東京」엘 도착했으나 교황사절을 만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경찰의 눈치를 살피며 우여곡절끝에 12월 25일 오후 3시 교황사절관에 들어서니 비서신부가 나와서 『지금 병환중이어서 면회가 곤란합니다. 내게 대신 말씀하시면 전하겠읍니다』라고 했다.
필자는『그건 곤란합니다. 극비의 말씀이니 병상이지만 꼭 만나게 해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초조한 순간들이 지나고 간신히 교황사절 침실로 안내되었다. 프랑스인인 바오로 마렐라 사절께서 잠옷차림으로 일어나 앉으시기에 원 주교님의 밀사로 왔다고 말씀드린 후 한국교회 실정을 이야기했다. 즉 일본인교구장 후임설에 대한 얘기였다. 교황사절은 『일본인 주교를 보내겠다』고 했다.
필자는 정신이 아뜩해짐을 느끼며 『한국인 주교를 내야 합니다. 사절각하. 조상들이 조선땅에 와서 백골이 묻혀가며 전교한 정신은 일본인 주교를 탄생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임진왜란·한일합방의 시련을 겪은 한국땅에 일본인 주교를 보낸다면 저도 현해탄을 건너기 전에 이 사제복을 바닷물에 던져 버리겠읍니다』라고 항변조로 설득전을 폈다. 그리고『20만 한국신자와 60명의 한국인 신부들의 가슴에 뼈아픈 한을 남기시겠읍니까? 한국의 모든 신자가 갈길을 잃고 한국인성직자가 당장 옷을 벗어야 옳겠읍니까?』하고 호소했다.
드디어 교황사절께서 『한국인 주교를 임명토록 교황청과 선처할테니 안심하십시오』하지 않는가! 2시간 반 동안 땀에 흠뻑 젖어 있던 얼굴에 기쁨의 눈물이 흘러 넘쳤다.
이듬해 1월 1일 현해탄을 건너 원 주교님께 이 사실을 보고드리니 주교님께선 진정 기뻐하셨고、 1월 18일 마침내 노기남 교구장 취임식이 명동성당에서 거행됐다. 아! 목이 메인채 수많은 신자들·성직자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만담을 이루었고 이 장면이 뉴스 영화로 찍혀 전국 극장에서 1달간 상영되기도 했다.
그리고 12월 20일 노기남 교구장은 교황 삐오 12세 성하로부터 정식 주교품을 받았는데、 이는 한국신부들이 총독부의 눈길을 피해 비밀 사발동문을 돌려 교황께 건의한 결실이기도 했다.
그 노기남 대주교도 가시고나니、 일제때의 시련과 교황사절과의 면담시 기억이 더욱 아프게 떠오른다.
※고침=제1413호 本面「다시 태어나고 司祭의 길을」題下 기사중 1931년은 1831년의 잘못이므로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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