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섭이 휴가를 갔다가 하룻만에 부대로 되돌아온 날로부터 며칠 후 <왕고참>이 제대해 나가기 전날 밤이었다.
왕고참은 기섭을 숙소 밖으로 데리고 나가더니 어는 뒷골목의 한 술집에서 술을 사며 기섭에게 실로 감명 깊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금까지 내가 너를 업신여기고 구박하고 너에게 여러 가지로 고역을 시킨 점들에 대해서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네가 여러 가지일들을 충실히 잘해 주었던 것들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한다. 그래서 너와 헤어지는 마당에 너에게 도움이 될 만한 얘기를 하나 해주고 싶어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 우리 단둘이서만 말야… 네가 얼마 전에 휴가를 갔다가 이틀 밤도 못 지내고 돌아왔을 때부터 선임하사는 너를 말뚝으로 만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너 같은 처지에 군대에 온 것부터 너는 말뚝감이지만 말야. 그러나 하여튼 너는 절대로 말뚝을 박지 말아라. 선임하사 그 사람이 별의별 소리로 너를 홀리고 욱박질러도 절대 넘어가서는 안된다. 생각해 봐라. 군대에서 실컷 고생을 하고 여러 가지 경험을 쌓았으면 사회에 나가서 다른 모습으로 잘살아 봐야지! 안 그래? 너같이 집도 절도 없고 부모형제 일가친척 하나 없는 것은 외롭고 삭막해서 살기가 어려 웁기도 하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홀홀단신 처럼 간편하고 홀가분한 것은 또 없다. 혼자 목구멍살기처럼 쉬운 일이 또 어디 있겠냐! 그러니까 내 말 자알 새겨듣고 추호도 다른 생각에 빠지지 말고 있다가 기한이 차거든 나처럼 볼 것 없이 제대를 해서 사회로 나가거라! 알겠냐?』
잠시 말을 쉬고 왕고참은 기섭에게 술을 권하면서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이었다.
기섭은 왕고참과 、난생 처음으로 윗사람과 동석하여 술을 마시면서 가슴이 심히 뭉클거리는 것을 느꼈다.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꽉 차오르면서 용기 같은 것도 치솟았지만 그러나 분명하게는 헤집어볼 수 없는 심정이었다.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 같은 것도 매어 달리는 것이었다.
왕고참은 기섭이 아무런 반응도 나타내지 못하자 빙긋이 웃고 나서 다시 말을 시작하였다.
『너、 월남 갈 생각 없니? 요즘에도 대개 차출을 해서 월남에 보낸다지만、 지원병은 무조건 환영해 준다더라. 지원만 했다하면 제때 제때에 간다는 거야. 내가 너한테 월남에 가보라고 하는 것은 좀 미안한 얘기다만、 그래도 너를 위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니까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여튼 잘 생각해서 월남에 가보도록 해봐! 월남에 간다고 해서 다 죽거나 병신이 되어 돌아오는 건 아니다. 그리고 돈을 벌려고 누구나 다 돈을 벌어 오는 건 아니다마는 그래도 한달에 만 몇천원씩 나오는 전투수당을 잘 아껴서 적금에 넣으면 일년후 귀국할 때 목돈이 된다. 그 돈을 밑천 삼아서、 제대하고 사회에 나가면 뭐 한가지라도 할 수 있단 말야. 까짓것 죽기 아니면 살기다. 죽는 놈들 보다 살아오는 놈들이 훨씬 많으니까. 너는 그 많은 쪽에 들기만 하면 돼! 이런 얘기하는 것 좀 무엇하다만、 만약 명이 짧아 죽는다 해도 서려워 할 부모도 형제도 없으니까 죄짓는 일도 아니겠고、 이 세상에 그렇게 한되는 일도 없을 테니까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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