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막달레나는 이 까타리나의 맏딸로 1807년(純祖7)에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은 신자가 아니었으나 부인의 권유로 代洗를 받고 죽었으며 모친 까타리나는 독실한 교우로 그녀와 함께 거의 같은 날에 獄死하였다. 이 모녀의 신앙생활과 信心에 대하여는 까타리나를 이야기하면서 서술한 바 있거니와 이제는 모친의 도움에 힘입은 막달레나가 어떠한 생활을 하면서 殉敎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막달레나는 외교인집안 식구들의 억압에 견디다 못해 모친과 형제들을 따라 외가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녀의 外祖母가 이미 교우였었기 때문에 그들은 편안히 교리의 본문을 지켜 나갈 수가 있었다. 그녀는 모친의 가르침을 고분고분하게 따라 열심히 배웠으며 곧 천주와 이웃을 사랑하는데 깊이를 가지게 되었다.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드리며 길쌈과 바느질을 부지런히 하여 가계를 돕기도 하였다.
나이가 18세에 이르자 집안에서는 그녀를 어떤 교우에게 출가시키고자 하였다. 이에 막달레나는 그것을 거절하고 모친에게 童貞을 지키고자 하는 원의가 있음을 고백하였다. 모친은 딸의 소원을 이해할 만큼 열심한 교우였으나 외교인들이 딸의 守貞生活을 이상히 여길까 염려되었고、한편으로 만일 자기가 죽는 경우에 아무 의지할 데 없는 딸을 그대로 둘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생각을 딸에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막달레나는 결코 자신의 굳은 결심을 바꿀 수가 없다고 되풀이 하였다. 그녀에게는 하느님께 몸을 바치는 것이 가장 행복 되고 안전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오래지 않아 막달레나는 자신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집안사람들과、여러 가지로 의심하는 외교인들을 피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가 어떤 교우 집안의 하인으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그녀는 힘든 일이나 어려운 사정들을 돌보지 아니하고 주인 집안의 일들을 즐겁게 도와주었다. 그러나 너무 힘든 일을 많이 하였고 음식도 변변히 먹지 못하여 이내 병으로 눕기에 이르렀다.
병이 완쾌되자 그녀는 좀 쉬운 일자리로 옮겨가 여러 해 동안을 생활하였으며、이제 조금씩 절약한 돈으로 집에 있는 어머니의 생활을 도와드릴 수도 있었다.
설흔살로 자란 막달레나는 이제 혼인을 이야기할 사람도 없으리라 생각하고 모친에게로 돌아와 지내게 되었다.
그녀는 지극한 효성을 보이는 동시에 열심으로 이웃을 도와 주어 모든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다.
무식한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로해 주며、병자들을 간호하고 죽을 위험에 있는 외교인어린이들에게 代洗를 주기에 열심이었다. 그녀는 온화하고 겸손하며 너무나 헌신적이어서 쉬운 일은 남에게 시키고 어려운 일은 자신이 하였다. 자신이 받는 고통은 돌보지 아니하며 박해로 인하여 당할 수 있는 위험까지도 전혀 개의치 아니하고 돌아다녔으므로、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여자의 몸으로 그처럼 많은 일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의심하였다.
1838년(憲宗4)에 이르러 박해가 보다 심해지고 외교인들도 더욱 교우들을 못살게 굴었기 때문에 막달레나는 모친과 함께 서울로 가서 살기로 하였다. 앵베르 주교는 그들이 서울로 올라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회장들에게 명하여 그들이 거처할 곳을 구해주도록 하였다. 막달레나 모녀가 생활하도록 된 조그마한 집에는 이미 조발바라와 그녀의 두 딸이 외교인 부친의 억압을 피하여 생활하고 있던 터였다.
함께 생활하게 된 이 진실한 여교우들은 서로 용기를 북돋아 주면서 박해를 받으면 이를 참아내자고 항상 권면하였다.
다음해 기해교난이 시작되고 포졸들이 주교를 찾기 위하여 돌아다닌다는 말을 듣고、누군가가『주교님이 잡히시면 우리도 자수 합시다』라고 제의하였다. 이에 막달레나는 즉시 『예、자수해도 된다면 우리 주 예수와 목자들의 뒤를 따르기 위하여 그렇게 합시다』라고 대답하여 의지를 표하였다.
그러나 이 다섯 여교우들은 자수의 기회를 갖지 못하였는데、그 이유는 포졸들이 그 집에 들이닥쳐 모두를 체포하였던 까닭이다.
이때 막달레나는 33세의 나이로 童貞女였다. 그녀는 捕廳으로 압송되어 처음에는 포장대리에게、다음에는 捕長에게 문초를 당하였지만 절대로 굴하지 아니하고 굳게 참아내었다.
3개월여를 옥에 갇혀있는 동안 막달레나는 모친을 보살피면서 형벌을 달게 받았다. 그러던 중 계속적인 형벌로 몸이 쇠약하게 되었고 당시 옥중에 만연하던 열병에도 걸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839년 9월에 獄死하게 되니 이제 그녀는 모친과 함께 바라던 殉敎의 榮光을 얻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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