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고참은 한잔을 더 비우더니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퀴、넌 이양과 얘기를 나누면서 더 마시고 와』
그리고 왕고참은 여자에게 오늘 술값을 모두 자기에게 달아 놓으라고 이르고는 여자로부터 배웅을 받으며 술집을 나갔다.
기섭은 왕고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여자와 단 둘이 있게 된 것이 묘한 당혹감을 가지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따스한 설레임、미지의 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을 때처럼의 신선한 두근거림과도 같은 것이었다.
잠시 후에 여자는 소리 없이 들어와서 다시 기섭 앞에 나붓이 앉았다.
『한잔 더 드세요. 그리고 저한테두 한잔 주세요』여자는 기섭의 술잔에 찰랑하게 술을 붓고 나서 주전자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기섭은 주전자를 받아서 여자 앞에 놓인 술잔에 넘치도록 따라 주었다. 그때 그는 불현듯、이 여자가 만일 나에 대해서 자세한 것을 알게 된다면 적어도 내가 천출이라는 것과 비천한 생활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쩌나、나중에 그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마음을 갖고 어떤 분위기를 만들까?……달갑잖은 생각이 연이어 떠올랐다. 새삼 자신의 처지가 아프게 느껴지고、지난날의 그 울울한 공간 속의 비천하고 고달팠던 생활이 갑자기 한스럽도록 서러워졌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처지와 과거가 부끄럽고 역겨워질 뿐、자신의 심성이 혐오스러워 지는건 아직 아니었다. 그는 문득 그 울울한 공간 속의 뼈 아픈 자기 비하-의 감정들이 새롭게 그리워졌다. 어떤 의지와도 같은、새로운 자기 비하감의 그의 가슴을 덮었다.
점차 명백하게 그의 가슴에 그 여자를 존귀하게 만들어 주고、존귀한 여자로 대해 주고 싶은 진정한 의지가 싹터 올랐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사랑하고 싶음이 뭉클거렸다.
지난날 그 울울한 공간에서 마냥 굴종하며 비천한 일과를 치르며 때로는 느끼하게 감득하던 오묘한 감정같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외롭고 가련한 여인을 부유하고 오만한 여인、오 영주… 못지않게 존귀하게 만들어 주고 싶은- 그것은 여듯 진실한 감정이었다.
『자、같이 드세요』
여가자 방긋 웃으며 자기 술잔을 집어들었다.
기섭은 일단 환상의 언저리에서 돌아와 술잔을 들었다.
그와 여자는 술잔을 맞부딪친 다음 똑같이 마시기 시작하였다. 기섭은 진실로 그 여자에게 마음을 바치고 싶었다. 그러나 또 한 차례 서러운 감정이 가슴 속으로 조수처럼 밀려들었다. 그는 취기가 온 몸에 팽창함에 따라 한층 더 서러움이 부풀었고、눈물방울을 흘리면서 혀 꼬부라진 소리로 흥얼흥얼 분명치 않은 말을 지껄였고、아리랑 아라리오를 노래 불렀다.
여자도 적당히 취해서 한결 예뻐진 얼굴로 기섭의 서러운 기분에 맞추어 어머니 아버지 한도 많은 세상 바닥에 왜 나를 낳았나요를 청련하게 불렀다.
다른 주객들이 들어와서 간혹 헤살을 부리기도 하였지만 접대하는 아가씨들이 또 있었으므로 기섭과 그녀는 오래도록 마주 앉아서 주거니 받거니 술과 슬픔에 흠뻑 취하였다.
그러나 영업제한 시간이 가까와져서 방범대원이 왔을 때 그 여자는 기섭을 부축하여 일으켜 세웠다. 이제 고만 돌아가세요. 또 오세요. 난 댁이 굉장히 좋아졌어요. 자주 오세요. 쫑알쫑알하면서 그 여자는 그를 골목 밖까지 바래다주었다. 기섭은 갑자기 술이 깨는 듯 하면서 아쉬움과 허전함、새로운 슬픔 등에 덜미를 잡힌 채 휘적휘적 숙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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