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현경련 베네딕따는 유명한 천주교신자요 역관(譯官)이었던 집안에서 1794년(正祖18)경에 태어났다. 부친은 1801년의 신유교난(辛酉敎難)말기에 순교한 현계흠(玄啓欽)이며 그녀의 동생인 현석문(玄錫文)까롤로도 1846년 9월 19일 병오교난(丙午敎難)때에 순교하였다. 그녀의 시댁 또한 유명한 교우 집안으로서 시아버지인 최창현(崔昌顯)은 한국교회 창설의 주역으로서 활동하였으며 신유교난때에 순교한 인물이기도하였다.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신앙을 익혀온 터라 베네딕따는 일찍이 신심(信心)생활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부친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노모(老母)를 모시면서 동생 까롤로와 몹시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으며、한편으로는 박해자들의 눈을 피하여 자주 이사를 다니는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17세가 되던 해에 그녀는 최창현의 아들과 혼인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3년 후에 남편을 여의고는 자식이 없었으므로 친정의 모친에게 돌아가 침선(針繕)으로 생계를 이어 나갔다.
남편을 잃고 홀로 생활을 하면서도 베네딕따는 항상 안온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신의 영혼사정을 돌보아 주시는 주님께 감사를 드렸으며、『천주께서는 더 쉽게 그를 섬기고 나의 영혼을 구하게 하려고 하셨다』라고 말하면서 주님을 찬미하였다.
가족과 함께 기도와 묵상ㆍ독서를 정한 시간에 반드시 실행하며 주님을 섬기는데 냉담한 적이 전혀 없었으므로、사람들은 그녀의 집안이 그렇게 화목하고 열성적인 것에 감탄하였다. 한편 그녀는 바느질을 해서 생기는 약간의 돈을 한 푼도 제 몫으로 떼어 놓지 않고 집안을 위해서 내어 놓았으며、자신의 성화(聖化)에 힘쓰는 이외에도 다른 교우들의 신심생활을 위하여서도 헌신하였다. 무식한 사람에게는 교리를 자세히 가르쳐 주고 냉담한 사람들은 열심히 권면하며、근심하는 이를 위로해 주고、병자를 간호하며、죽음에 임박한 외교인(外敎人)자녀들에게는 진심을 다하여 대세(代洗)를 주었다. 또한 전교 신부들이 순회할 때에는 교우들을 자기 집에 모아 놓고 성사 받을 준비를 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그녀는 앵베르범 주교께서 체포되실 때 범 주교께 기록하시던「앵베르 일기」즉 「기해일기」의 원본인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그녀에게 맡겼으며 그녀는 그 일기를 계속해서 기록하다가 다시 그녀가 체포될 때 그의 동생인 현석문에게 맡겼으므로 오늘날 우리들은 기해년에 순교한 성인들의 기록을 볼 수 있었고 더 나아가 그 기해일기에 기록된 모든 순교자들 거의 다 시복식과 시성식을 가져서 오늘날 성인성녀들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여회장이 된 현베네딕따의 이러한 모범적인 종교 활동과 열성적인 신앙생활은 곧 외교인들과 박해자들의 눈에 띄게 되었으며、이에 박해가 일어나고 얼마 안 되어 그녀는 제일 먼저 고발된 교우들 중에 끼게 되었다. 고발된 것을 알자 그녀는 얼마동안 숨어서 지냈다. 그러나 5월에 이르러 포졸들은 그녀가 숨어사는 곳을 알아내고는 그녀를 체포하여 압송하기에 이르렀다.
포장(捕長)은 베네딕따의 동생인 까롤로가 서양인 샤스땅(Cbastan)신부의 충실한 복사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입을 통하여 까롤로가 숨어 있는 곳을 알아내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녀는 다른 교우들이 받는 이상으로 혹독한 형벌을 당해야만 하였으며、문초도 여덟 차례나 받았다. 포졸들은 그녀로부터 선교사들에 관한 정보를 얻어내서 현상금을 탈 생각으로 임의적인 형벌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굳고 참을성 있는 결심으로 그들은 그녀에게서 어떠한 정보도 얻어낼 수 없었다.
8월 23일에 형조(刑曹)로 이송된 베네딕따는 어떻게나 혹독한 형벌을 당하였던지 그녀의 육신 전부가 거의 상처투성이였고 그 상처에서는 피와 고름이 흘러내려 몸을 가눌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당시 옥중에서 유행하던 열병에 걸려 한층 더 많은 고생을 해야만 하였다. 이때 그녀는 동생 까롤로에게 편지를 보냈는데、여러 교우들이 그것을 읽고 감탄하여 마지않았다 한다. 그러나 이 편지는 오늘날까지 전해지지는 않는다.
이러한 베네딕따의 굳은 결심을 도저히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한 형조에서는 마침내 그녀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게 되었다. 사형집행일이 되어서도 그녀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마음의 평온을 지닌 채 집행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평안한 마음으로 잠을 자고 난 그녀는 영원한 복락의 세계를 바라면서 잔치에 나가듯 6명의 순교자들인 시삼촌 되는 최창흡ㆍ이영덕ㆍ한영이ㆍ정정혜ㆍ조증이ㆍ고순이 등과 함께 서소문(西小門)밖의 형장으로 향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참수(斬首)를 당하여 천상에 오르니、때는 1839년 12월 29일이요、그녀의 나이는 4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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