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섭은 사령부 직할 경비대의 특수 파견대 소속이었다. 그는 숙소에서 잠을 자고 아침 일찍 기상하면 곧바로 장군의 관사로 가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근무를 하였다. 그가 장군의 관사에 있는 동안은 장군의 부인과 그 가족들이 그의 상관이나 다름없었다. 사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장군 부인과 가족들의 신앙의 일도 보살펴 주고 자질구레한 심부름도 해주고 집 안의 모든 잡일들을 하는 것이 일과였다. 말하자면 장군 관사의 사역병인 셈인데、사회로 말하면 하인 같은 것이랄까…하여튼 그는 장군관사에서의 하루 일과를 마치면 점호시간 무렵에 관사를 나와서 취침시간 쯤에는 숙소로 돌아가 침상에 몸을 눕히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그런 근무와 일과들에 대해서 별다른 느낌을 갖지 않았다. 자신의 적성에 맞는 것일지 모른다는 얄궂은 느낌이 있긴 있었지만 그 외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의 일과들이 몸에 힘겹거나 마음에 역겨운 것도 아니었다. 그는 충실히 근무하였고 열심히 일과들을 처리하였다. 그러다보니 장군의 가족들과 기섭 사이에는 어떤 정 같은 것도 생겨나게 되었다. 장군의 가족들 사이에서 기섭은 이제 분명한 존재였다. 그의 착한 성품과 충직한 면모들은 특히 장군의 부인 마음속에 깊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섭은 다음날 장군관사에서의 하루 일과를 마친 다음 장군의 부인、그로 말하면 사모님을 만나 뵙고 월남에 갈 뜻을 밝혔다. 부인의 부름에 의하지 않고 기섭이 요청하여 개인적인 용무로 부인 앞에 나선 것은 처음 있은 일인 동시에 상당히 외람되고 당돌한 것이었다. 그러나 기섭은 자신의 파월지원、그 의사에 관한 이유들을 소상하게 말하였다.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였고 자꾸 옥죄이는 가슴 때문에 몹시 힘이 들었지만 그는 조리 있게 말하고 부디 허락해 주십사고 간청하였다.
사실 그것은 사모님의 마음에 달린 일이었다. 우선은 사모님의 허락이 떨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사모님의 그 허락은 허락이상의 어떤 결과까지도 포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모님이 허락을 하지 않는다면 별수 없이 모든 것은 허사요 수포일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사모님은 일단은 놀라고、처음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잠시 동안은 노여운 빛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섭이 물러나지 않고 집요하게 그리고 더욱 간절하게 말하니까、사모님은 무엇인가를 골똘이 생각하는 빛이었다. 그리고 마침내는、정 그렇다면…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기섭은 사모님이 그지없이 고마왔다. 어떤 죄스러운 마음마저 옹켜 들어서 그는 눈물이 났다. 그는 깊이 허리를 구부려 절을 하고 사모님 앞을 물러나왔다.
장군관사를 나와 숙소로 들어가는 길에서 기섭은 왕고참을 만났다. 그리고 왕고참에게 그 기쁜 사실을 말해주었다. 왕고참은 뛸 듯이 기뻐하며 내일 당장 경비대 인사과에 가서 파월신청을 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기는 자기대로 할일이 있다면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다음날 기섭은 경비대 인사과에 가서 파월신청을 하였다. 인사과의 담당사병은 편한 생활을 하면서 왜 월남에 가려느냐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기섭이 무학력에다가 사고무친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는 파월신청서를 사령부 부관참모부에 올리긴 하겠지만 특명이 날지는 모르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기섭은 빙긋이 웃었다. 결격사유가 여실한 자신이 입대를 하였다는 그 사실에서도 그는 더욱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인사과를 나오면서 그는 기쁘게 웃음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아슴히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