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이영덕 막달레나는 1840년 1월에 순교한 이인덕(李仁德)마리아의 언니로 1811년(純祖11)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모친 조발바라가 열성적인 교우였던 반면에 부친은 고집스러운 외교인(外敎人)으로 이모녀들의 심신생활에 많은 고난을 안겨 주었다. 본래 명문의 집안이었다고는 하나、그 가족의 내력은 자세히 나타나지 않으며 더욱이 당시에는 곤궁한 처지에 빠져 있었다.
어려서부터 막달레나는 어른과 같이 점잖고 마음이 매우 온화하였다. 당시 그녀의 집에는 의지할데가 없던 외할머니가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 외할머니가 열성적인 교우였던 관계로 쉽사리 천주교에 접할 수가 있었다. 그녀는 모친과 동생 마리아와 함께 외할머니로부터 천주교의 교리를 배웠으나、부친의 눈을 피하여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교리를 가르쳐 주던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부친이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 틈을 타서 세 모녀는 몰래 성세를 받았다. 그녀의 부친은 이러한 사실을 안 다음부터는 더욱더 천주교를 미워하였으며 이 때문에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아야만 하였다.
막달레나가 스무 살에 이르자 부친은 그녀를 어떤 외교인(外敎人)과 결혼을 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결혼에 동의하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으며 오히려 오래전부터 열망하여 왔던 동정(童貞)을 지키고자 하여 꾀병을 하였다. 부친은 이러한 핑계에 넘어가지 않고 엄혹하게 다루면 딸이 복종할 것이라 생각하고는 막달레나를 몹시 학대하였다. 그녀는 어떻게 하면 부친의 완고함을 꺾을 수 있을까 궁리한 끝에 손가락에 상처를 내어 감격할 만한 혈서를 써서 부친에게 드렸으나 헛일이었다.
부녀 사이에 있은 이러한 대립은 몇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나이 스물일곱살에 이르렀을 때 막달레나는 이제 이 강압적인 혼인을 모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여 앵베르(Imbert)주교를 찾아가 집을 떠날수 있도록 허락을 청하였다. 주교는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는『그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요. 집에 남아있는 것이 나을것이오. 그러나 부친께서 권하는 혼인은 하지않는 것이 좋겠소』라고 말하면서 집에 남아있기를 권고하였다. 그녀는 이러한 주교의 권고대로 집에 있으면서 다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몇달 후 혼인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사정이 급박하게 되었다. 이에 막달레나는 모친과 동생과 함께 집을 빠져나와 친한 교우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앵베르 주교는 아직 조선의 풍속을 잘 알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양반집 부인과 처녀들이 도망을 쳤다가 집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죽음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그러한 실정을 주교에게 자세히 말씀드리고 다른 방법을 구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주교는 그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준 후 회장들에게 부탁하여 그 일을 될수있는 한 잘 해결하도록 하였다.
막달레나는 이제 동생과 함께 모친을 모시고 자신의 뜻대로 살수가 있었다. 회장들이 마련하여 준 조그마한 집에서 그들은 굶주림과 추위로 많은 고생을 하였지만 마음놓고 신심생활을 하면서 곤궁과 고통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막달레나는 주님께 감사하며 동정을 지키고 날로 신덕(信德)을 두터이 하였다. 이때 성녀 이까타리나와 조막달레나 모녀가 그집으로 옮겨왔으므로 그들은 서로 격려하며 더욱 마음을 굳혀나갔다. 기해교난의 박해가 시작되자 그들은 기회가 오면 자수하여 순교하자고 서로 권면하였다. 그러던 중 7월경에 이르러 포졸(捕卒)들이 그 집에 들이닥쳐 모두를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포청으로 압송된 성녀 이막달레나는 주뢰 등의 형벌과 목마름、굶주림、옥중의 여러가지 고초 등으로 시달렸으며、자신과 같은 자리에 누워 계시던 모친께서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심은 조금도 변치 아니하였다.
포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후에도 막달레나는 새로운 고문과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관원들은 혹독한 형벌에도 변함이 없는 그녀의 항구심(恒久心)을 알고는 결국 사형선고를 내리게 되었다. 영광된 순교의 날이 다가오자 막달레나는 여느때처럼 화평한 마음으로 형장으로 향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서소문(西小門)밖에서 참수(斬首)를 당하였으니、때는 1839년 12월 29일이요、그녀의 나이는 2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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