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기에 동방교회가 떨어져 나가고 계속 서방교회는 발전되었다. 당시 세속 어느 단체보다 강한 정신력을 가진 가톨릭은 사회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시골 조그마한 읍에서도 읍민전원이 가톨릭신자이고 보니 읍장보다는 자연히 그곳 본당신부가 더욱더 큰 비중을 갖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라디오도 신문도 없었던 때이므로 국가의 주요 공지사항이 있을때는 국가기관원들이 본당신부를 찾아내서 주일 미사때 국가공지사항을 전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교회의 신장은 더욱 계속되어 어떤 국왕이 대관을 받기 위해서는 교황의 승락이 있어야 했고 지방관리가 되기 위해서도 자연 그 곳 주교들의 추천이 있어야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자연히 권력과 결탁이 되어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게 되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과 정치에는 부패가 따르게 마련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부 성직자들이 권력과 금력으로 세속적으로 타락하기도 했다. 일부 수도자들도 수도생활보다 세속적으로 즐기기도 했다.
성직자들의 세속권리가 신장이 되자 일부 귀족들은 자격없는 자기 자녀들을 무더기로 성직품에 올리기도 했다.
이러한 현실속에서 광신적인 묵시록 주의적이고 또는 공산주의적인 주장의 이단자가 여기 저기서 일어났다.
예컨대「후스」파의 이단이 생기고「보헤미아 형제단」은 사제들의 독신제도를 부정하고 교회재산을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시기에 소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루터(1483~1546)는 아우구스띠노 수도원에 소속된 수사신부로 천재적인 기질을 가진 가톨릭 신부였다.
루터는 당시 건전하지 못했던 가톨릭의 교육을 받았고 특히 그는 유명론(唯名論)을 배워 옥캄, 아미이, 또는 비엘은 이해했으나 가톨릭신학의 거성인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유행하던 이단설을 정확히 분별을 못하고 이단설을 자기 주장을 위해 인용하기도 했다.
그는 신학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예컨대 그의 오류중 몇가지 예는『우리의 영혼은 선행을 할 수 있는 어떠한 힘도 없다. 원죄를 범한 인간은 속속들이 부패되어 어떤 선행도 보속도 할수 없다』고 했다. 그의 구원론은『우리를 구원시키는 것은 우리의 선행이 아니라 순수한 하느님의 자비만이 우리에게 구원의 힘이 된다』『하느님의 은혜를,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구원을 받지마는 그 구원의 결과는 우리 영혼이 내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망또로 가리워지는 외적 성화뿐이다. 왜냐하면 죄로타락된 인간은 근원적으로 의화될수 없다』이것이 그가 말한 신학적인 오류였다.
이러한 때에 소위 교황청에서는「대사령」을 반포하여 베드로 대성전 건립에 착수했다. 이 대사령을 세간에서는「면제부」라고 오역을 하고 있으며 이것이 소위 종교개혁의 불씨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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