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정화경 안드레아는 1807년(純祖7)경에 충청도 정산(定山)고을에 사는 부유한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성이 순박하고 양순했던 반면에 머리가 둔하고 너무 고지식하여 훗날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앵베르(Im-bert) 주교와 여러 교우들을 밀고하게 된 사건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배워온 신앙생활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 언제나 교리의 본분을 지켜 나갔다. 성장한 후에는 외교인 친구들이 천주교를 봉행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자 스스로 고향을 떠나 새로운 피난처를 마련하고 교우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교회의 일에 참여할 나이가 되자 안드레아는 자주 서울을 내왕하면서 힘자라는 대로 열심히 교회의 일을 도왔으며、교회의 상황뿐만 아니라 앵베르 주교에 관한 일까지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이때 순성(順性)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배교자 김 여상이 주교의 피신처를 찾기 위하여 이리 저리 다니던 중 안드레아와 만나게 되었다. 배교자 여상은 안드레아와 친분이 있는 신입교우들에게、『서울에서는 똑똑한 교우들이 대관들 앞에서 천주교의 진리를 설명하였소. 그리하여 이제 여러 대신들도 눈을 떠서、누군가가 그들에게 복음을 자세히 설명하여 주기만 하면 모두가 받아들일 것이오. 천주교가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때가왔소. 특히 주교님이나 신부님들이 나타나기만 하면 온 조정이 분명히 천주교에 들어올 것이오. 그래서 정 하상(丁夏祥)바오로가 주교님께 드리는 편지를 갖고 왔으니 주교님이 계신 곳을 알려 주시오』라고 거짓으로 말하였다.
이 말에 속은 신입교우들은 안드레아가 주교님의 처소를 알 것이라고 생각하여 김 여상을 그의 집으로 인도하였다. 안드레아는 여상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의심하는 마음은 조금도 갖지 않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위험한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하룻밤을 궁리한 후 여상만을 데리고 소식을 알아보러 가겠다고 이야기하였다. 이리하여 앵베르 주교는 너무나 순박하면서 고지식하였던 안드레아로 인하여 체포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주교가 체포된 후에도 안드레아는 종교의 자유가 선포될 것이라는 포졸들의 말에 속아 몇몇교우들의 집을 일러주어 그들이 체포당하도록 하였다. 포졸들은 이제 그를 이용하여 모방(Maubant)샤스땅(Chastan) 신부의 거처까지도 찾아내고자 하였다. 이때 신부들은 주교의 편지를 받고 안전한 곳에 숨어서 새로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기다리던 중 주교의 제자 이재의(李在誼)토마스와 신부의 복사였던 최(崔)베드로는 주교에 대하여 확실한 소식을 알고자 신부들의 허락을 얻고 서울로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들은 길을 떠난 첫날 안드레아를 만나 함께 서울을 향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도중에서 포졸들이 안드레아를 알아보고는 온갖 거짓으로 그를 유혹하였으며 순박한 그는 다시 포졸들에게 속아서 함께 있는 동료들이 신부들의 거처를 알고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스스로 박해자들의 모략을 간파하여 지금까지 자신이 속아왔음을 깨닫고는 또다시 그러한 모략에 속지 않기 위하여 포졸들 몰래 그 두명의 교우들과 함께 신부들을 찾아본 후에 위험이 박두했다는 것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잘못을 저질렀던 자신을 반성하면서 자기의 잘못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도 순교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에 그는 신부들에게 신앙을 고백하고 스스로 자수하겠다고 이야기하였으나 신부들이 그것을 말렸으므로 몸을 피하여 숨을 곳을 찾았다.
이곳저곳으로 숨어 다니던 안드레아는 배교자 김 여상의 눈에 또다시 띄게 되었다. 이제 그는 신부들의 말씀대로 배교자의 말을 한마디도 듣지 않았으며 오직 천주교의신앙만을 이야기하였다.
진실된 그의 마음을 다시는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한 여상은 그를 포졸들에게 인도하여 포청(捕廳)으로 압송토록 하였다. 포청에 이르자 포장(捕將)은 그에게 배교하기를 명하면서 여러 가지로 위협하였다. 그러나 깊은 신앙심을 간직하고 있던 안드레아는 포장이 재촉하는 것을 단연 거절하였다. 오랫동안 경솔함으로 인하여 안드레아가 그들에게는 큰 봉사를 한것 임에도 불구하고 포졸들은 그에게 사정을 두지 않는 혹형을 가했다.
그는 주뢰형(周牢刑)을 받고 대꼬챙이로 온몸이 찔렸으며 치도곤(治盜棍)도 1백대 이상을 맞았으나 조금도 신앙심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옥에 갇힌지 5개월 후인 1840년1월23일(陰1839년12월19일)에 교수형(絞首刑)을 받아 순교에 이르니 이때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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