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일순 어리벙벙 하였지만 이어 서서히 꿈속에서의 일이 눈앞에 떠 올랐다.
신기하게도 꿈과 현실이 정확히 일치하고 있음을 그는 의식하였다. 그러나 다만 희한하게 여겨질 뿐이었다. 때문에 그는 크게 놀라웁거나 분노와 슬픔등이 강렬하게 치밀어 오르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것들을 아직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믿고 싶지 않은 마음도 가슴에 서렸지만、별수 없이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력한 힘으로 쳐들어오는 듯하였다. 그러자 곧 온몸에서 맥이 풀려나갔고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러면서도 재미있다는 얄궂은 생각이 뛰어 들어와서 흐흐흐、기묘한 웃음이 떨어져 나왔다.
문득 그는 그녀가 있던 자리、그 옆의 방바닥을 보았다. 간밤에 그녀와 뜨겁게 몸을 섞으며 흘려내었던 분비물을 닦은 구겨진 휴지뭉치가 황당하고 을씨년스럽게 내버려져 있었다. 그를 한결 더 허망하고 망연케 하는 간밤의 증거물이었다. 갑자기 아리고 쌔한 현기증이 머리를 휘감으며 전신을 유린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 자리에 쓰러져 베개에 얼굴을 묻고 신음을 쏟으며 온 몸을 뒤틀어 대었다. 오열을 참는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진정하고 다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때였다. 맑은 종소리가 방 안으로 들어와서 그의 어깨 위에 떨어져 내렸다. 그 성당의 종소리임이 분명하였다. 그의 기억 속에 또렷하게 살아있는 종소리였다.
2년전 그날、그녀와 처음으로 사랑을 나눈 날밤의 어둔 새벽녘에 베갯맡으로 떨어져서 그의 잠을 깨우고 그를 각성시키던 종소리였다. 그가 그녀와 사랑을 맹세하고 장래를 약속하러 처음 성당에 갈 때 마치 축복처럼 온 하늘에 울려퍼지며 풍성하게 길바닥에 내리 깔리던 종소리였다. 그 뿐인가. 그가 2년동안 이역만리 월남에서도 잊지 못하며 자주 꿈 속에서도 듣고 낮의 실제 생활속에서도 절절한 그리움으로 떠올리곤 하였던 바로 그 종소리였다.
그러나 아아、이제 그 종소리는 참으로 뼈아프고 허망한 것이었다. 너무도 허황하고 덧없는 소리였다. 그의 어깨위에 떨어져 내리는 그 종소리는 다만 공허한 종소리의 파편들일 뿐이었다. 바람에 진 꽃잎들이 맥없이 내리는 형국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기섭은 다음 순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성당에 가야한다. 자신만이라도 오늘 성당에 가야한다는 일념이 강한 불기둥처럼 가슴에 서는것이었다. 그는 새삼 방안을 둘러보았다. 창문에 걸쳐서 커튼사이로 비집고 들어 오는 햇살이 온 방안을 밝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멀리서 들려오는 앰블런스의 숨가쁜 경적이 기섭의 귀에 이상한 느낌으로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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