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섭이 제대증을 받아가지고 부대밖으로 나왔을 때 세상은 그에게 참으로 암담하고 황막하였다. 그는 갈곳이 없었다. 다른 모든 제대자들은 한결같이 자랑스러운 모습들을 하고 바삐 고향으로 돌아가는데、그는 홀로 갈곳없이 길에 버려진 꼴이었다. 다른 제대자들이 모두 떠난후에도 그는 홀로 남아서 한참동안을 더 부대 정문앞에 쓸쓸히 서있었다. 어디로 가야한담…. 물론 뾰족한 생각이 날리 없었다. 그는 그때 자신의 신세가 새삼 너무도 처량하여 목젖이 아리고 죽고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죽을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대로 죽어서는 안돼.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도로 부대안으로 들어가서 제대를 취소해버리고 군대생활을 계속할까、하고 생각하였지만、그러면 신경숙-그녀와 만날수가 없을것 같았다. 부대안에 갇혀살아서는…. 사회에서 자유로이 운동하며 살아야 그녀를 만날수 있다는 생각이 어떤 희망마저 포유한채 그를 온전히 장악하는것 같았다.
기섭은 그 순간 그녀가 간절히 보고싶어졌다. 월남에 있을때보다는 더욱 절실하게 그녀가 그리워졌다. 그러자 그녀가 자기를 그렇게 냉혹하게 배신한채로 아주 영영 사라져 버리지는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짐짓 해보는、어쩌면 간절한 갈구였다. 터무니없는、어리석은 생각일뿐이었다. 그런데 기섭은 그런 갈구와 같은 마음만이 가슴속에서 운동할뿐、그녀를 찾을 어떤 방도를 취해볼 생각이나 그녀에 대한 복수심같은건 조금도 가슴에 들지않았다.
왜 그녀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을까? 왜 그녀를 증오하고 저주하는 마음이、복수심같은것도 생겨나지 않을까? 그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자신의 마음이 이상하였다. 정녕 이상하고 얄궂게도 느껴지는 마음이었다.
그는 불현듯 3년전의 일을 떠올렸다. 입대를 하고나서 1년만에 첫 휴가를얻어 고향에 갔을때…자신에게 일장의 소식도없이 모든 토지와 유서깊은 고가(古家)까지 팔아버리고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던 오영감네의 마님과 애기씨…. 그때도 그는 그들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들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마음을 갖지않았다. 잠시 다만 어처구니 없고 허허로운 마음만을 가슴에 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찾을마음도 그는 품지않았다. 행정관서에 남아있을 그들의 자취를 찾아 쫓아보면 그들과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지만、그때는 그런 생각을하지도 않았고、설령 그런 생각이 들었다해도 그것을 실행치 않았을 것이었다. 그저 다만 체념적인 마음? 야릇하고 얄궂은 마음 뿐이었던 것이었다.
나는 왜이런 마음을 갖고살까?…기섭은 비로소 자신의 그런마음、이상하고 야릇한 심성에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나의 이런마음은 곧 무기력한 마음이 아닐까? 그리고 굴종적인 마음이 아닐까? 또한 비천한 사람이 어쩔수없이 갖게되는 마음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태생부터 비천하고 온순 나약할수밖에 없는게 아닐까?…남을 미워할줄 모르고 남과 싸울줄도 모르는 온순 나약하고 무기력한 마음은 착한 것이기보다 비천함과 굴종을 의미하고 바보라는 것을 증명하는게 아닐까?…
그러나 기섭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리 그렇다해도 그것에서 돌발하는 마음으로 자신이 그녀를 미워하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를 증오하고 저주하고 싶지가 않았다. 어쩌면 그녀에 대한 얄궂은 기대를 자신의 가슴 속에서 꺼버릴수가 없는 때문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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