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이문우 요한은 경기도 이천(利川) 고을의 동산밑이라는 마을에 살던 양반 교우의 집안에서 1810년(純祖10)경에 태어났다. 어떤 기록에는 그의이름이「경천」이라고도 나왔는바、이는 아명(兒名)인 듯하다. 5세때 그가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자 어떤 여교우가 양자로 삼아 서울로 데리고 갔는데、이후 성장하면서 그가 양모에게 나타낸 효성은 대단히 지극했었다고 한다. 독신생활을 원하고 있던 그가 양모의 소원에 따라 결혼했다는 사실에서도 그의 효성을 엿볼수가 있다.
결혼후 요한은 교우 남편으로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으며 아내와 자녀들이 죽은 후에는 독신으로 살며 자선사업에 열주하고 전교신부들을 도와주는데 열중하였다.
1년 이상이나 모방(Maubant)신부를 따라 지방으로 다니며 복사(服事)의 일을 하였고、1839년(憲宗5)에는 박해로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돕기위하여 희사(喜捨)를 모아 도왔으며、숨어있는 주교와 신부들에게 교우들의 형편을 전하기도 하였다. 또한 선교사들이 순교한 후에는 교우들과 함께 순교자들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일이 항상 자신에게 위험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그는 교회의 일을 돌보기 위하여 그러한 위험을 생각하지 않았던것이다.
교회의 일을 어느정도 마친다음 요한은 시골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10월 6일(陰) 그가 묵고있던 집으로 포조들이 갑자기들이닥쳐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일시 당황하였으나 이내정신을 가다듬고『천주께서 나를 특별한 은혜로 부르시니 어찌 그말씀을 따르지 않을리오』라고말한 다음 순순히 포청(捕廳)으로 끌려갔다.
이틑날 포장(捕將)앞으로 불려간 요한은 교회의 모든 사정에 대하여 신문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미 명백하게 알려진 일에 대해서만 사실을 말하였다. 포장은 그의 마음을 돌릴 생각으로 너는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어찌하여 과거를 보아이름을 드러낼 생각을 하지 않느냐? 어찌하여 사악한 종교를 믿어 임금님의 명령을 어기고 목숨을 잃으려 하느냐? 지금이라도 그 교를 버린다면 목숨을 구해주도록 대신들에게 품신(稟申)하겠다. 아무 이유도 없이 저 불충한 무리들처럼 죽으려고 고집하느냐?고 하면서 회유하였다.
요한은 이말에 『어떻게 사람으로서 즐거운 마음으로 죽기를원할수가 있겠읍니까?그러나 임금님의 명령에 복종하려면 만물의 조물주이신 하느님을 배반해야할것이니 죽어도 그렇게 할수없읍니다. 포장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미 오래전에 생각했던 것이오니 더이상 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대답하여 자신의 뜻을 명백히 나타낼 뿐이었다. 포장은 그래도 술과 음식을 그에게 가져다 주도록 하면서 달래려고 하였지만 그의 굳은 결심을 바꿀수는 없었다.
요한은 다시 옥으로 보내졌다. 그옥안에는 배교자들과 도둑들이 섞여있었는데 마치 지옥을 연상시킬 정도로 어지러운 곳이었다 슬픈마음으로 그가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을때、한 종사관(從事官)이 그에게 다가와서「네옷이 훌륭한 것을보니 돈을 감추어 둔것이 분명하다. 어디에 돈을 숨겨두었는지 말해라』고 강요하였다. 그가 가진것이 없다고하자、종사관은 곤장(棍杖) 20대를 치도록한후 그를 다시 가두었다. 상처난몸으로 여러날을 지내면서도 요몸으로 여러날을 지내면서도 요한은 배교한 교우들을 보고는『저불쌍한 사람들을 어쩌면 나보다 착하게 살아왔는지도 모르는데 지금은 저렇게 타락하지 않는가? 천주여、약한 저의 마음을 도와주소서! 』라고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러던중 형조(刑曹)로 이송된 요한은 그곳에서도 굳센 마음으로 신앙을 증거하였다. 교우들과 함께 옥에 갇혀있던 12월 22일(陰)에 그는 양부모님과 교우들을 위하여 편지를 썼는 바 이 글에서 요한은 옥중에서 생활하던 교우들의 신앙태도와 신심생활、자신의 지난 생활에 대한 깊은 반성과 주님을 향한 애덕、교우들이 주님의 신앙을 잃지 않도록 하는 부탁 등을 교리에 비추어 간절히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옥중서간을 통하여 당시의 순교자들이 어떻게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괴로움을 참고 이겨냈는가를 다시 한번 확실히 알수가 있는것이다 이렇게 신앙을 증거하며 옥중생활을 하던 요한은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고 자신이 바라던 순교의 영광을 얻게되었으니、때는 1840년 2월 1일(陰1839년 12월 28일)로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그에대한 처형은 당고개(堂峴)의 형장에서 참수(斬首)로 행하여졌으며、성인 홍영주(洪永周) 바오로와 최영이(崔榮伊) 바르바라가 그의 영원한 동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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