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내리셔서 조금만 걸어오시면 돼요』
소년가장 홍석현(가브리엘·15·수원 은행동본당)군을 찾아가는 길은 걷는 일로 시작됐다.
그러나 조금만 걸어가면 된다는 석현이네 집은 웬만한 청년의 걸음으로도 20~30분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 버스로도 네 정거장. 고지대로 오르는 산 언저리에 소년이 살고 있는 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장실과 바짝 붙어있는 반평 남짓한 부엌을 지나 방안으로 들어서자 어른 두명이 누우면 가득 찰 듯한 방에서 석현군의 할머니가 먼저 맞는다.
걷기엔 부담되는 거리 아니냐고 했더니 석현이는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러나 나중에 안 일이지만 자신은 물론 네 살 아래의 여동생 정원(아녜스·성남 은행초교 5년)이와 몸이 불편한 할머니조차도 차를 타고 다니는 일이 없다고 한다.
중학교 3학년인 석현이는 「가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꿋꿋한 표정에 든든한 인상이었다. 밝으면서도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같은 또래의 여느 중학생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오히려 제 나이 또래 아이들보다 때가 덜 묻은 듯한 태도가 대하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었다.
이런 모습의 석현이지만 그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사연들을 가슴 속 한 곳에 쌓아두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 그러나 애써 태연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는 석현이의 눈빛에서 가슴속 상처를 다시 들춰내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석현이 남매에게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6년 전이었다. 경기도 동두천에서 채소 가게를 하던 아버지와 아동복 가게를 하던 어머니와 살았던 단란한 한 때는 석현이 남매에게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었다. 33평 아파트에서 정원이가 쳐대던 피아노 소리는 지금도 단란했던 옛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있다. 그러던 가정이 깨어진 것은 한 순간. 가게를 운영하며 어머니가 지기 시작한 빚은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급기야 가출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빚쟁이들이 들이닥친 집은 가재도구 하나 남김없이 쓸려 가버리고 말았다.
어머니의 가출로 의기소침해있던 남매에게 그나마 아버지는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힘이었다. 아버지 친구가 하는 채소가게를 새 삶의 터전 삼아 성남으로 올긴 이후의 생활은 하루아침에 천국에서 추락한 삶이었다. 계약금 500만원에 월 14만원짜리 단칸방으로 옮긴 남매를 위해 아버지는 밤낮 쉴새없이 일에 매달렸다. 그 덕에 방 두 칸쩌리 지하방으로 옮길 수 있었다. 이 때 남매의 희망도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러나 이런 행복도 잠시, 98년 겨울 아버지에게 심장병이 발병한 것이다.
고된 일과 지하방의 좋지 않은 환경이 병을 깊게 해 급기야 지난 6월 아버지는 일을 하러 나선 길을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석현의 아버지는 전세를 빼 치료를 하자는 주위의 권고를 끝끝내 물리치며 두 남매를 위한 마지막 선물을 남겨둔 것이었다.
아버지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석현이는 정원이와 하루아침에 천애의 고아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러나 낙담하거나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당장 하루하루 살아갈 길이 열다섯 나이로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수입이라고는 동사무소로부터 받는 생계지원금 15만원에 본당에서 지원해 주는 5만원 등 20만원 안팎. 가끔씩 들어오는 후원자들의 후원금까지 합쳐야 30만원이 넘지 않는 돈으로 쌀값, 반찬값, 난방비 대기도 벅차다. 그래서 성남으로 옮겨오고 나서 정원이는 주위 친구들이 다 다니는 미술학원이나 피아노학원 구경도 못해봤다. 석현이도 겉으로는 괜찬하도 하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농구를 하는 것 빼곤 딱히 친구들과 어울릴 만한 거리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나마 할머니 장옥봉(데레사·79·서울 창동본당)씨가 울타리라면 울리타리고 할까. 아버지가 죽고 서울 창동 큰아버지집에서 지내던 할머니가 석현이네 에 와서 살면서 형쳔이 조금 나아진 편이다. 그러나 할머니 장씨마저도 내일모레면 여든을 바라보고 있는 데다 10년도 더 된 고혈암과 안면마비, 수전증 등으로 한몸 추스르기도 버거운 상황이어서 이들 남매의 앞날에는 환한 날보다 그림자가 드리울 날이 많아 보인다.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당장의 큰 불편은 없어요』
석현이와 정원이의 낙천적인 모습은 할머니와 아버지를 빼닮은 모양이다.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낮에는 노인대학이고 성당이고 몸을 녹일 수 있는 곳을 찾고, 어둠이 까맣게 내릴 때까지 전등을 켜지 않는 삶을 구차스러워하기 보다 견딜 만하다고 말하는 할머니, 학원에 안다니니 친구들과 놀 시간이 많다는 두 남매. 그들의 이런 삶은 이웃들이 조금씩 채워주고 있다. 두 평 남짓한 방을 채우고 있는 장롱이며 텔레비전, 책상마저도 누가 버린 것을 주워온 것을이다. 세탁기는 다시 단칸방으로 이사를 오면서 먼저 살던 사람이 몸도 가누기 힘들어하는 할머니를 위해 놓고 간 것이다. 그래도 석현이는 날씨가 추워지면 더해지는 할머니의 병세가 걱정이다.
축구, 농구, 달리기 등 체육을 좋아하는 석현이는 내년 봄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고로 진학해 빨리 취업전선에 나설 예정이다.
『어서 빨리 커서 돈 많이 벌어 몸이 불편하신 할머니를 좀 큰 집에서 편하게 모셨으면 좋겠어요』
당장의 꿈을 얘기하지 못하는 두 남매. 어른이 되면 지금보다 나아질 것 같아 빨리 컸으면 좋겠다는 남매에게서는 제 나이로는 감당해니기 힘든 삶의 아픔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어린 저것들을 생각하면 눈물밖에 쏟아지는 게 없습니다. 제가 죽으면 저 불쌍한 것들을 어찌할꼬…』
할머니가 매주 4000원과 2000원씩 주는 용돈이 학년이 오르면서 조금 올라가는 것을 기뻐하는 석현이와 정원이는 영락없는 아이였다.
학교에서 선생님과 친구로부터 착한 아이라고 칭찬을 많이 듣는 정원이, 170㎝를 넘는 큰 키에 구김살 없이 잘 어울려 친구들로부터 인기가 높은 석현이, 할머니는 두 남매가 지금처럼만 잘 자라주길 매일 두손 모아 기도한다.
『하느님께서 함께 해주시니 언젠가는 기쁜 날도 많겠죠』
성탄 연극 준비를 위해 성당으로 나서는 두 남매의 어깨 위로 내리는 햇살 속에서 하느님을 맞이하려는 기쁨이 슬픔을 녹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뒤로 하고 남매가 매일 걸었을 길을 되돌아 걸어나오는 걸음은 훨씬 가볍고 따뜻했다.
※도움 주실 분=국민은행 601-01-0611-531 가톨릭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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