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희성 작가의 그림을 보면,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정의배(마르코) 성인의 모습에서 다른 성인들과 한 가지 다른 점을 느낄 수 있다. 댕기를 묶은 아이들이 정의배 성인을 따르고 그는 포대기에 싸인 한 아기를 안고 있다는 점이다.
정의배 성인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증거했으며 회장으로서 20년 동안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등 다른 순교자들과 비슷한 일을 했다. 하지만 그가 좀 더 우리에게 기억되는 이유는 고아구호 단체인 ‘성영회(영해회)’를 맡아 돌보았기 때문이다.
서울 창동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정의배 성인은 평소 유학자로서 천주교의 교리가 제사를 금지하는 등 당시 규율에 어긋났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839년 기해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들이 하느님을 증거하며 목숨을 선뜻 내놓는 것을 보고 감동해 스스로 천주교 서적을 구입, 공부하고 입교했다.
홀로 결단한 신앙은 계속 이어져 1845년 페레올 주교가 입국한 후 회장으로 임명돼 순교할 때까지도 자신의 직무를 철저하게 수행했다. 그는 또 1854년 성영회가 조직되자, 직접 맡아 안타까운 상황에 놓인 고아들을 돌보았다. 철종 통치 당시였던 1850년대에 파리외방전교회가 세운 고아구호단체 성영회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지만, 1866년 베르뇌 주교가 순교한 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1865년 5월 입국한 브르트니에르 신부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기도 했으며, 볼리외, 위앵, 도리 신부 등도 모두 정의배 성인의 집을 왕래했다. 이처럼 그는 회장이라는 직분 외에도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유학자였던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주위의 교우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일을 도맡아 했다. 실제로 배치서와 정복길, 이득삼 등에게 교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1866년 병인박해의 박해 바람이 몰아닥치자 정의배는 베르뇌 주교가 체포될 때 함께 체포됐던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밀고로 2월 25일 새벽 체포된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그는 2회의 심문을 받고 3월 2일 의금부로 옮겨져 모진 고문을 받았다.
정의배는 심문 당시 ‘동료 교우들의 이름을 대라’는 요구에 이미 죽은 신자들의 이름만을 진술하며 끝까지 순교 의지를 밝혔다고 한다. 결국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3월 11일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제자 우세영(알렉시오) 등과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72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정의배의 시신은 처형된 지 며칠 후 그의 아내가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거둬 갔는데, 가족들에 의해 노고산(현 서강대학교 뒤편에 위치)에 안장됐다고 전해진다. 1968년 10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가 됐으며, 1984년 5월 다른 성인들과 마찬가지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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