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최재선 주교님이 독일에 갔을 때 그곳 주교님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중 독일에서는 신부 부족이 대단한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니까 최 주교님은 ‘사제를 양성해서 반은 우리나라에서 일하게 하고 반은 독일로 보내자. 그리고 독일교회를 도와주는 조건으로 양성비는 독일에서 대라고 하자’는 생각을 하시게 되셨다.
최 주교님은 나와 정진석 주교님을 불러 의논하셨는데 내가 “아무 조건 없이 길러 독일에 필요하면 독일에 보내고 다른데 필요하면 다른 데 보내고, 그렇게 선교 사제를 길러 내는 것이 오히려 좋을 듯하다”고 말했다.
내가 의견을 내놓자 최 주교님은 아직 사무총장이던 나와 당시 청주교구 정진석 주교님, 대전교구 황민성 주교님과 함께 한국외방선교회 설립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셨다.
외방선교회의 가능성을 검토하던 중 1974년 내가 주교가 됐고, 1975년 주교회의에서 한국외방선교회 발족을 정식 결의했다. 주교회의에서 최재선 주교님을 외방선교회 초대 총재로 추대하고 로마에 보고했는데, 후에 로마에서 교구를 가지지 않은 주교는 총재직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연락이 왔다. 당시 최 주교님은 부산교구장직을 사임하고 교황청 직속 성직자 포교 연맹 한국지부장으로 계셨다.
그래서 내가 제3대 총재가 돼 외방선교회를 맡았다. 외방선교회가 발족됐을 때 이미 쇠약해진 최 주교님은 서울에서 학생들과 함께 사셨는데 내가 총재직을 맡자 “이제 모든 것 맡기고 부산으로 갑니다”라고 하셨다.
외방선교회를 육성할 필요성을 느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아시아 지역을 복음화하는데 있어 선교사다운 신부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발전하는 외적표지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국외방선교회다. 외방선교회는 우리나라 성숙도의 한 척도가 된다.
외방선교회 창설은 내가 수원교구장을 하면서 보람을 느낀 일 중 하나다. 이제 외방선교회를 더욱 잘 키워 중국을 포함, 아시아 지역 선교에 좀 더 힘을 쏟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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