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나선 설이 닥친 5일장.
살짝 열린 문 틈새로 김이 푹푹 쉴새없이 뿜어져 나오는 방앗간은 잔설이 깔린 시골 장텃길에서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곳, 지나치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문을 열어 보고 싶은 열기에 사로잡히게 한다.
버스정류소 바로 옆에 있어 너른 평상과 함께 사람들의 쉼터가 되어 주던 곳., 동네 아주머니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던 곳, 동네 꼬마녀석들이 주인 아주머니 몰래 떡 훔쳐 먹던 곳….
명절이면 새파란 하늘을 오르는 하얀 김이 읍내 어귀에서부터 보이던 떡 방앗간. 김으로 가득 찬 방앗간은 아이들 눈에 별천지였다.
갓 나온 떡을 한입 베물 때의 행복은 이른 아침 장 나들이에 따라 나선 부지런이들만의 특권이다.
점심 나절이면 맛볼 그 특권을 위해 바득바득 새벽길을 따라 나선 길을 왜였을까? 차례를 기다리며 마음씨 좋게 생긴 이웃 마을 아주머니가 집어주는 떡으로 맛 들이는 또 다른 세상 때문은 아니었을까.
가래떡, 절편, 약식, 백설기, 무지개떡, 경단….
「나도 크면 저런 떡 많이 만들어 먹어야지」
방앗간은 잠시나마 넘쳐나는 풍요로움 속에 이웃과 내가 허물어지는 곳이다.
서두근 새벽길, 미처 준비해오지 못한 참기름이나 소금을 건네는 손과 손에는 김이 모락 모락 나는 갓 나온 떡이 들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김이 뿌옇게 찬 방앗간이어야만 시골의 구차한 삶을 녹여낸다.
새해를 맞았다는 기쁨을 방앗간에서 먼저 느끼기에 매서운 새벽길을 나서는 지도 모른다.
방앗간에 할머니가 가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저녁상이 기대되던 그 시절, 방앗간은 마음마저도 넉넉하게 해주는 존재였다.
이렇게 해 설날 상에 차려지는 떡은 지난해 수고의 열매이자 한해 새로운 다짐의 씨앗이다.
30년째 서울 창신동골목 시장에서 떡방앗간을 해오고 있는 이용희(세실리아·70·동대문본당·사진) 할머니.
지금은 그래도 기계가 좋아져 알아서 잘 돌아가지만 예전에는 물에 불린 무거운 쌀을 직접 들어 기계에 부으며 돌아가는 모습을 일일이 지켜봐야 했다. 하루에 한, 두 가마니씩 떡을 만들었던 시절은 어느덧 기억에만 있는 과거가 돼버렸고 지금은 명절이래야 가래떡을 찾는 정도.
그러나 고향에 대한 향수 탓인지 설날이 다가오면 다시 분주해지는 방앗간 풍경을 지켜보며 삶에 대한 작은 기대를 품어본다.
설날이면, 점점 사라지는 풍경 속에서도 따듯한 가슴만은 그대로이길 바라는 마음은 할머니와 방앗간을 찾는 모든 이의 숨은 기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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