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엽제 파문’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 5월, 왜관의 미군기지 ‘캠프 캐럴’에 대량의 고엽제 드럼통을 묻었다는 증언이 알려지면서 사건이 불거졌고, 이제는 왜관뿐 아니라 전국 미군기지에 대한 의혹으로 그 범위가 커지고 있다. 논란이 시작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문제를 신앙인들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 고엽제란
‘초목을 고사시키는 제초제’라는 의미의 고엽제(枯葉劑, defoliant)는 흔히 미국군이 베트남전 당시 적군이 숨을 밀림을 없애고 군량 보급을 차단할 목적으로 밀림에 다량 살포한 2·4·5-T계와 2·4-D계를 혼합한 제초제를 가리킨다.
고엽제는 특유의 강한 독성 때문에 그 위험성이 꾸준히 제기됐다. 1969년 미국은 연구를 통해 2·4·5-T계와 2·4-D계 제초제를 합성할 때의 부산물인 다이옥신이 인체에 각종 암과 신경계 마비를 일으킬 수 있다고 밝히고 사용을 중지한 바 있다. 특히 1994년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 군인과 민간인 등 약 200만 명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발표한 바 있으며, 한국의 베트남 참전용사들 중에서도 고엽제로 인해 상당수가 두통·현기증·가슴앓이 등 고엽제 질환을 겪고 있다. 국제연합(UN)은 고엽제를 ‘제네바일반의정서’에서 사용 금지한 화학무기로 보고, 베트남전 이후 고엽제 사용을 금하고 있다.
■ 사건의 발단
이번 파문은 1978년 왜관 ‘캠프 캐럴’ 미군기지에 근무한 적 있는 퇴역 주한미군 스티브 하우스씨의 증언으로 시작됐다. 하우스씨는 5월 16일 미 애리조나 지역 TV와의 인터뷰에서 “왜관 캠프 캐럴에서 ‘컴파운드 오렌지(에이전트 오렌지)’라는 베트남전에 사용됐던 고엽제 드럼통 250여 개를 2개월에 걸쳐 묻었다”고 밝혔고, 이후 방송사는 하우스씨와 같이 복무했던 로버트 트라비스씨 외 1명의 미군이 추가로 이 같은 사실을 증언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미8군 관계자는 5월 19일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면 반드시 실시할 것”이라는 입장을 내놨고, 한국과 미국 정부는 문제의 신속하고 투명한 해결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환경부와 현지 주민대표, 환경단체 등이 참여하는 민관합동조사단을 서둘러 구성했다.
■ 왜관 주민들의 반응
한미 공동조사단이 철저한 조사를 약속했지만 왜관 주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캠프 캐럴 앞에 무수히 붙은,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현수막들이 그에 대한 방증이다.
미군기지와 몇 백m 안 되는 곳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은 대부분 오랜 세월 지하수를 생활 식수로 음용했으며, 그나마 몇 년 전에 상수도를 설치한 가구도 몇 안 된다고 한다.
오랫동안 이 지역에 살고 있으며, 고엽제 파문 진실규명에 앞장서고 있는 이만호 동부발전협의회 추진위원장은 “비가 많이 온 날 개천으로 물고기가 떼죽음 당하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며 “당장 저부터 해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씻고 마시는데 의심 없이 지하수를 사용했는데, 지금은 너무 두렵다”고 말했다.
■ 증폭되는 의혹들
고엽제 매몰 의혹이 제기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속 시원한 진상 규명이나 해법은 나오지 않고 있다.
데이비드 폭스 미8군 기지관리사령관은 5월 23일 캠프 캐럴에서 가진 첫 설명회에서 “1978년 캠프 캐럴 내 화학물질을 저장하던 41구역에서 살충제, 제초제, 솔벤트 등 화학물질과 오염 토양을 헬기장 부근 D구역으로 옮겨 묻었다”며 “그 후 다시 그 물질과 토양을 모두 파내 반출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미군은 화학물질과 오염토양을 어디로 옮겼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며, 관련 기록을 찾는 중이라고 밝혔다. 고엽제 피해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는 미군이 대규모 이동 및 처리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을 리 없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이다.
한미 공동조사단이 6월 2일부터 캠프 캐럴 기지 내 조사를 벌이면서도 미군 측은 유독 토양조사를 미루고 있다. 공동조사단은 기지 주변과 기지 내 수질 조사, 헬기장·D구역·41구역에 대한 지표투과레이더(GPR)와 전기비저항탐사(ER), 땅속 금속성 탐지에 효과적인 마그네틱 조사방법 등을 동원하고 있으나, 이러한 방법들은 유해물질 오염 여부를 가리는 데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고엽제 부산물인 다이옥신이 물에 잘 녹지 않는 성질이 있어 토양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의심 지역 땅속을 직접 파거나 시추를 통해 토양을 조사하는 것이 진상규명의 지름길이라는 것이 왜관 주민들과 민간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 다이옥신, 이미 검출됐다
2004년 주한미군은 삼성물산에 의뢰해 캠프 캐럴 기지 내 41구역과 D구역에 대한 환경조사를 벌였다.
삼성물산이 미군 극동사령부 공병대에 제출한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D구역과 41구역의 토양과 지하수에서 기준치 이하지만 다이옥신이 검출됐고, 맹독성 발암물질인 테트라클로로에틸렌(PCE)이 국내 먹는 물 기준의 1110배, 비소 2420배, 수은 808배, 살충제 린단은 최대 4380배나 검출됐다. 결국 주한미군은 이 지역이 고엽제나 다른 화학물질에 의해 오염됐거나 오염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고도 사실을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이에 캠프 캐럴 고엽제 매립 진상규명 민간대책협의회는 6월 30일 기지 주변지역 토양 및 지하수를 조사하고, 7월 13~15일 지역 주민 역학조사를 실시해 피해 상황을 확인했다.
지역 주민 역학조사에 참여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주영수 공동대표는 “가족 또는 이웃의 증언을 통해 매원3리에 1990년 전으로 20대 청년 두 명이 백혈병으로 사망한 것을 확인했다”며 “백혈병은 발생률이 지극히 낮아, 한 마을에 두 명은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 주 대표는 이어 “고엽제 후유증으로 공식적으로 알려진 질병 가운데 백혈병처럼 희귀한 암도 포함된다”며,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조사를 하면 진상규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이번 사건을 계기로 캠프 캐럴 이외의 미군기지에 대한 환경오염 사태에 대한 문제점들도 속속들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 복음적 가치에 따른 행동 절실
이번 사태가 시작된 직후, 캠프 캐럴을 담장 하나 사이에 둔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한국진출 1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봉쇄를 풀고 주민들의 아픔에 함께하고자 거리로 나섰다. 수도원은 주민설명회와 세 차례의 주민문화제 등을 통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제기하고 있다.
왜관수도원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고진석 신부는 “원래 지하수에는 다이옥신이란 물질이 절대 나와서는 안 되는데도 미군은 극소량 검출이 마치 문제가 아닌 양 진실을 은폐하려한다”며 “고엽제를 DMZ에 살포하고 주거지역 인근에 묻은 행위는 제네바협정에 근거해 명백한 전쟁 범죄”라고 말했다. 고 신부는 아울러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수도자들이 이 땅이나 물, 공기, 사람 등 모든 피조물들의 고통과 함께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이러한 계기를 통해 주민들의 의식도 깨어날 수 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또한 대구대교구와 안동교구 정의평화위원회도 수도원 및 진상규명대책위와 행동을 함께하고 생명평화미사를 봉헌하는 등 예언자적 소명을 실천하고 있다.
대구대교구 정의평화위원장 김영호 신부는 “우리 생명을 담보하고, 우리 국토를 오염시키고, 우리 후손의 생명까지 위협한 일이기 때문에 진실이 분명히 규명돼야 한다”며 “내 땅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그 땅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주권의 문제, 나아가 소파(SOFA, 한·미 행정협정) 조항의 개정 문제까지 분명히 다뤄야 한다”고 밝혔다.
김 신부는 이어 “미국이 우리의 은인이고 혈맹이라는 관계성 때문에 없었던 일로 하자는 것은 무척 비복음적인 발상”이라며 “생명, 정의, 평화 등 복음적 가치에 기준을 두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 뜻에 맞는 결정인지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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