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들어오다 가톨릭교회에서 하는 피정은 처음 접해 봤는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성찰의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김영주 목사)
“서로가 지닌 ‘다름’ 속에서 그 ‘다름’을 통해 창조주 하느님의 다양한 면모를 새롭게 깨닫고 나눌 수 있어 뿌듯한 마음입니다.”(대한성공회 교무원장 김광준 신부)
“우르르, 우르르르….”
전남 구례 지리산 피아골, 며칠째 이어지는 빗속에 불어난 계곡물 소리만이 울렸다. 하얀 포말 속에서는 간간이 돌 구르는 소리가 먼데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위원장 김희중 대주교)가 천주교와 개신교 성직자가 함께한 가운데 13~15일 ‘피아골 피정집’에서 마련한 ‘한국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한 피정 모임’에서는 자연이 협연하는 소리보다 더 큰 깨달음의 울림이 들리는 듯했다.
교회일치위원회가 매년 실시하는 ‘한국 그리스도인 일치운동 전국모임’ 일환으로 열린 이번 피정은 시간을 거듭할수록 개신교 성직자들에게도 매력적인 프로그램으로 다가가는 듯했다. 개신교 전통에서는 쉬 접하기 힘든 피정이라는 장에서 만난 두 종단 지도자들은 2박3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피정의 참맛에 길들여지는 중이었다.
■ 사다리, 이어주는 존재
첫날 오후 피정집 인근 대한불교 조계종 연곡사 주지 종지 스님도 발걸음을 했다. “오롯한 믿음 속에 무슨 차별이 있겠느냐”는 뜻에서였다.
종지 스님은 ‘불교의 수행’을 주제로 한 첫 강의로 세속에서 쌓인 그리스도인들의 묵은 때를 벗겨냈다.
“계율은 목적에 이르는 수단입니다. 지붕 위에 난 풀을 뽑기 위해 사다리가 필요한 것이지, 풀을 다 뽑고 내려오면 사다리는 필요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런데도 세속 사람들 가운데는 이미 쓸모를 다한 사다리를 버리지 못하고 수고롭게 짊어지고 다니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모든 종교에서 믿음은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오롯한 믿음 속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종교인들은 만나야 하는, 그래서 각자가 지닌 진리를 나누고 베풀어야 하는 필연을 타고난 존재들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찾아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목동이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해 묘사한 심우도(尋牛圖)를 들어 얘기할 때는 곳곳에서 큰 주억임이 일었다.
“동자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산 속에서 우연히 소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듯이 꾸준히 수행을 하다 보면 아무 근거가 없는 곳에서 근거가 마련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 간의 일치를 향한 여정이 막막하게만 보일지라도 끊임없이 노력하면 그 가운데서 새로운 지평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당부로 들렸다.
▲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 위원장 김희중 대주교(왼쪽에서 세 번째)와 개신교 목사, 구세군 사관들이 환하게 웃으며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하루의 노고를 접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달콤한 쉼에 들기 전 바치는 끝기도 시간. 낯설기만 한 성무일도에 함께한 개신교 목사들과 구세군 사관 등은 이내 가톨릭 전례가 주는 경건함과 편안함 속으로 빠져들었다.
“두 눈은 깊은 잠에 빠져들어도/ 마음은 주님 안에 깨어있으니/ 주님을 사랑하는 당신 자녀들/ 오른손 펼치시어 보호하소서// 우리의 보호자여 굽어보시어/ 간악한 음모꾼들 물리치시고/ 우리를 성혈로써 구하셨으니/ 당신의 일꾼으로 삼아주소서….”
신부 목사 수녀 사관들이 번갈아 기도문을 읽었다. 목소리에서는 조금의 떨림이나 주저함도 없었다.
끝기도 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김영주 목사는 말했다. “만남의 시간이 쌓일수록 서로에게서 배울 것이 참으로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자가 지닌 영성, 말씀 등을 나눔으로써 서로가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 일치 피정 참가자들이 성무일도 끝기도를 함께 바치고 있다. 개신교 목사들과 구세군 사관 등은 낯설지만 가톨릭 전례의 경건함과 편안함에 금세 빠져들었다.
14일 아침 예배 강론은 성공회 박태식 신부(성공회대)가 맡았다.
“하느님은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리자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십니다. 유산을 받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소를 잡아 잔치를 여는 아버지입니다. 그런 목자, 그런 아버지가, 누구는 둘째 아들이라고, 누구는 예배를 좀 다르게 드린다고 배제하고 멀리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은 당신 말씀 잘 듣는 사람만 구원하고 그러지 않는 사람은 내치시는 그런 쫀쫀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신 분입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해선 국제협력국장이 기도했다. “그동안 쏟아냈던 수많은 말을 내려놓고, 주님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분열과 갈등을 넘어, 만나기 위해 다가서고 다가섬을 통해 만나길 원합니다.”
‘예수회 영성의 발자취’로 피정을 이끌어간 예수회 서석칠 신부(광주가톨릭대 교수)는 “정의 평화 사랑 같은 하느님의 가치가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며 “그 가치를 살아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이며, 다름 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 같음을 찾아내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 일치의 여정”이라고 밝혔다.
“대화의 삶이 영적 공간의 바탕이 됩니다. 우리 모두에게 있는 순교자의 영성, 십자가의 영성이 우리가 함께 기도하게 해줍니다.”
서 신부는 “아우슈비츠에서 자살한 사람보다 일본 도쿄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많은 현실”을 지적하며 그리스도인들의 몫을 돌아보길 요청했다.
■ 만남의 끝자락
“‘나눈다’는 것은 ‘바꾼다’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일치는 서로에게서 다름을 찾아내는 ‘분별심’과는 다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이끌어 가시도록 내어놓는 자세가 필요합니다.”(예수회 서석칠 신부)
“안에서만 볼 때와 만남 속에서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를 때가 많습니다. 만남이 주는 신선함, 가치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구세군 대한본영 김운호 사관)
“함께 묵상하고 대화를 나누면 그리스도 안에서 한길을 걷는 도반이라는 걸 느낍니다. 자신이 속한 신앙의 전통 안에서 개인적 신앙고백을 스스로 성찰해 보는 계기가 되는 거지요.”(한국기독교장로회 전철 목사)
피정의 끝자락, 다름 속에서 함께 머물렀던 피정은 각자의 내면에 조그만 피정집을 마련하는 여정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계곡에서는 깨달음의 돌이 굴러가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 ‘한국 그리스도인 일치를 위한 피정 모임’에 참가한 천주교와 개신교 성직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