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이야르 드 샤르댕은 과학과 신앙을 종합하여 일원적인 세계관을 구성한 신학자였던 동시에 과학자였다. 그는 하느님께 성실히 봉사한 사제였고 동시에 지구 안에 감춰진 것을 밝히고자 한 지질학자였다. 그는 또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찾고자 한 신비가였던 동시에 체험한 하느님의 현존을 선포한 선교사였다.
삐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은 1881년 5월 1일 프랑스의 끌레르몽 훼랑드에 가까운 오르닉이란 마을에서 평범한 가정의 열 한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지질학에 조예 깊은 아버지한테 떼이야르는 어려서부터 형제들과 함께 돌, 식물, 동물 등에 관해 많이 듣고 배우면서 그에 대해 크게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겨우 여섯 살쯤 되었을 때 집안의 비밀스런 구석에 쇠붙이나 함석 조각, 각종의 돌들을 적지 않게 모아 쌓아 둘 정도였던 것이다.
그가 10살 되던 해 리옹 근처의 몽그레의 노뜨르담 예수회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가 1899년 18세 되던 해 애스 관구의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1904년 예수회가 프랑스에서 추방당하게 디어 그는 져지의 샤넬 섬에서 철학과 신학을 계속 공부하였다. 신학과 우주의 생물들의 현상 사이에 있는 관련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 그는 암석학에 매력을 느끼게 디었고 그에 대해 열심히 연구하였다. 야외에 나갈 때엔 언제나 지질학자들의 도구인 작은 쇠망치와 확대경을 지참하였다.
1905년부터 1908년 에집트의 이스말리아에서 물리학과 화학을 가르쳤다. 중동에서 지난 이 몇 년은 그에게 평생 열정적으로 지구에 대해 연구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진화론에 큰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1908년부터 그는 수세쓰에서 출중한 과학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특히 암석이나 진흙 속에서 화석의 생명, 그 존재 연한 등을 연구하였다.
1911년 떼이야르는 사제 성품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화석에 관한 연구에 사명의식을 갖고 그에 몰입하였다.
1912년 그는 프랑스에 도아가 빠리의 국립 역사 박물관에서 탁월한 과학자인 마르쌜랭 블래의 지도를 받으며 연구에 열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위생병으로 군 복무를 하였는데, 그 전쟁 중 여러 곳에서 겪은 험난했던 체험은 그에게 오히려 자연과학적으로 많은 경험을 하게 하는 소중한 배움의 기회가 되게 하였다.
대전이 끝난 후 1919년 말에 38세의 떼이야르는 빠리로 돌아와 「포유류의 진화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획득했고 이어서 빠리 가톨릭 대학의 지질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떼이야르의 진화론적 인간관과 우주적 그리스도론, 과학적으로 추론된 하느님에 관한 사상을 예수회 장상들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여 그를 해외 주재 연구라는 구실로 중국으로 파견하고자 하였다.
1923년 예수회원인 동시에 지질학자인 리슨트가 그를 몽고에 초청하였고 그는 그 곳에 가 고고학 연구 자료들을 발굴하게 디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에게 있어서 아시아 탐험의 출발이었다.
1924년에 그는 화석 살자들을 가지고 빠리로 돌아가서 다시 교수직을 맡게 되었다. 그는 우주에 대한 견해를 정리하였으며 또한 전쟁 체험과 아시아의 광활한 공간의 체험을 그의 저서의 「하느님의 영역」의 초고에 요악하였다. 그 원고가 나돌기 시작하자 그의 진화에 대한 이론이 원죄 문제에 대하여 교리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비판이 일어났다. 이에 장상들은 그를 가톨릭 학술 연구소에서 떠나도록 결정했고 오로지 과학 문제에 대해서만 출판하도록 허락하였다.
1926년 그는 다시 극동 지방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중국 정부의 지질학 연구회와 다른 나라의 연구 단체들과 협력하면서 많은 것을 발굴하였다. 1926년부터 2년간 떼이야르는 몽고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주로 황하 강변에서 연구하며 머물게 되었다. 중국, 미국, 스웨덴 학자들의 요구에 따라 그는 극동 아시아에서의 화석 발굴에 책임을 지고 일하였다. 1928년 12월 떼이야르에 의해 훈련된 ㅣ젊은 중국인 발굴대는 북경에서 가까운 저우커우톈에서 북경원인(北京原人)의 유골을 발견하게 된다. 이 발견은 20세기 고생물학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로 꼽힐 만한 것이었다. 그 결과로 떼이야르는 중국의 지질학 관찰단의 과학 고문에 정식으로 추대되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는 미국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의 대학에 초빙되어 특강을 하였으며 세계의 여러 정기 간행물에 동물학, 고생물학에 대한 발굴 및 연구 결과를 계속 발표하였다. 1934년부터 인간과 진화론에 대해 신학적인 해석을 한 그의 저술과 논문은 프랑스의 지성인들 사이에 선풍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1939년부터 그는 북경에서 구금상태에 있었는데 그 기간에 그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인간 현상」의 원고를 썼다.
1946년 빠리로 돌아 온 그는 인발리데 근방 예수회 수도원에서 6년간 지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주변엔 늘 수많은 지성인들가 학자들이 모여들었으며 거의 매일 집회, 강연, 대화, 토론 등이 이어 전개되었다.
1948년 그의 주저서인 「인간현상」은 로마 교황청에서 서적 검열 중 문제점들이 지적되면서 출판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원고는 수많은 독자들에게 등사본으로 읽혔으며 그들 중엔 적지 않은 사제들과 신학생들이 있었다. 1950년 프랑스의 자연과학 아카데미 협회는 떼이야르를 그 회원으로 선출하였다.
교회와 수도회의 장상들은 떼이야르의 천재적 재능과 굳은 신앙을 조금도 의심하진 않았으나 교회의 가르침보다 앞서가며 많은 이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며 물의를 빚는닥 판단하여 그를 어딘가 멀리 보내려고 궁리하였다. 그 때 마침 떼이야르는 뉴욕에 있는 인간학 연구 단체인 뷘나 그렌 재단의 초청을 받아 그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 때가 1951년 그가 고희(70세)가 되던 해였다.
그는 틈틈이 북남미 일대의 많은 자연 과학 연구소들과 박물관들을 방문하였다. 1951년과 1953년에 이 노 학자는 다시 남 아프리카에 가서 발굴 작업을 하였다. 원시 최초 인류들의 기원이 그곳에서 이루어졌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54년 봄 그는 다시 빠리로 갔다. 그는 거기서 남 아프리카에 대하여 순수 자연과학적인 연구를 발표하였다. 그의 강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의 저항으로 그는 결국 강의 계획을 포기했고 즉시 뉴욕의 연구소로 돌아갔다.
1955년 4월 10일 부활 주일 저녁에 74세의 이 노인 학자 사제는 조용히 숨을 거두며 이 세상을 마감하였다. 그는 바로 한 달 전 프라읏에 있을 때 프랑스 의회의 환영식에서 자신이 부활 주일에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말한 바 있었는데, 주님께서 일생동안 유난히 무거운 십자가를 지면서 그 분을 따른 그의 소원을 기꺼이 들어주신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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