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의 전례 주제는 원수에 대한 사랑이다. 1독서는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다니는 사울왕을 다시 살려 주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 원수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게 한다. 『누가 감히 주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어른께 손을 대고 죄를 받지 않겠는가?』원수에 대한 복수는 하느님께 유보하라는 의미 아닐까!
그리고 오늘 복음의 전반부에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고 학대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라고. 그리고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고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까지, 그리고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고 하지 말고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라는 엄청난 요구를 듣게 된다.
보복하지 말고, 악을 선으로 갚아 악의 악순환을 차단하라는 것인데 율법과는 달리 아주 충격적인 요구이다.
우리는 우선 이 구정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는 이 구절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먼저 이러한 요구는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지켜져야 할 절대 규범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법을 제정하는 입법자도 아니셨고, 또한 대제관의 경비병이 예수님을 뺨을 때렸을 때, 다른 뺨을 돌려대지 않고 오히려 항의하신 사실(요한 18, 23)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둘째로 이 구절은 유대교가 가지고 있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유대교의 복수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인간사회에 정의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만이 인간사회의 악을 응징하고 정의를 세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바로 오늘 말씀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는 말씀인 것이다. 인간사회에 악을 없애고 정의를 세우는 길은 「악에는 악」이란 복수법이 아니고 「악에는 선」이라는 사랑의 법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런 사랑의 법만이 악의 악순환을 차단하는 길이요 인간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불의와 악을 없애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아무리 머리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이 구절과 실천이라는 문제를 함께 놓고 검토해 보면 매우 답답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오늘의 이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원수를 사랑해야지 하고 의지적인 결심을 한다 하더라도 사랑과 용서는 커녕 점점 더 미워지고 원한만 쌓이는 것이 범인들인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 아닌가!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요구를 하시는 예수님도 그분의 사명 자체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뤈할 수 없고,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을 대신하여 우리의 죄와 부족함을 짊어지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러한 요구를 지키지 못할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러면 어떠해야 한단 말인가! 예수님의 이 말씀이 비록 우리가 지킬 능력이 없다 하여 그냥 무시해도 되는 말씀도 아니고 , 우리 삶 속에서 악의 악순환을 끊어야만 된다는 요구는 포기할 수 없는 절대 진리라면 우리는 커다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저는 이 문제의 해답을 조카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제가 북평성당에서 사목할 때 어머니가 주방일을 도와주신 관계로 조카 성욱이는 3살 때부터 길게는 한달, 짧게는 몇일씩 놀러오곤 하였다.
그런데 이놈은 컴퓨터를 하다 모르는 나에게 이것 좀 해 주세요 하고, 무엇을 사고 싶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저것 좀 사주세요, 또 놀다 심심하면 아빠는 심심할 때 잘 놀아준다고 나에게도 같이 놀아달란다. 어떤 때는 짜증도 났지만 그래도 사랑스럽기에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을 기쁘게 해준다.
『내가 할 수 없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 그리고 『내가 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그 누구에게 청하고 맡기는 것』여기서 해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반복하지만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오늘 말씀을 하시면서 그누구보다 인간이 이 요구를 못 지킬 것을 잘 알고 계셨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 들으면서 그래 원수를 사랑하자 하고 결심하는 것만이 첫 번째 자세는 아님. 오히려 그보다는 내 스스로의 힘으로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먼저 하느님께 맡기고 청하는 용기가 우리가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가져야 될 첫 번째 자세일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지 못했다고 자신을 책망하거나 실망함 없이 비록 스스로의 힘으로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있기에 용기를 가지고 「악에 대한 선의 응답」을 시도할 수 있는 것이고, 원수 사랑의 실패 속에서 나의 무능과 하느님의 전능을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최고의 앎(知)은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최고의 신앙은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닐까!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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