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블뤼 주교와 위앵 신부, 장주기 요셉 등과 함께 군문효수로 순교한 황석두(루카) 순교자. 그의 영성은 현재 그의 이름을 딴 선교회가 있을 만큼 의미가 있으며, 우리들에게 친숙하다.
황석두가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 동기에 대해서는 그를 가르치던 한문선생의 권고로, 또는 우연한 기회에 천주교인을 알게 돼 인연을 맺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그의 가문이 전통적 천주교 가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한 이야기에 의하면, 충청도 연풍의 부유한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황석두는 어느 날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시험을 치르러 상경하던 중,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을 알게 된다. 교리를 배우다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고 일찍 돌아온 그에게 아버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화를 냈다. 그렇게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하며 교리서를 탐독한 그는, 이에 감동한 아버지와 가족들을 천주교에 입교하도록 했다.
이토록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황석두는 1845년 페레올 주교가 입국한 이후에는 아예 주교에게 절제와 금욕을 위해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았으며, 사제가 되기 위해 다블뤼 신부에게 몇 년 동안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아내가 있기 때문에 교황청에서 사제가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자 공부를 그만두고, 서천 산막골로 이사해 1858년 페롱 신부의 복사, 교우촌의 회장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또 다블뤼 주교의 복사로 전교활동을 도왔으며, 함께 교회서적을 번역하기도 할 만큼 교회의 여러 방면에서 재능을 보였다.
황석두 역시 1866년 병인박해가 휘몰아칠 당시 순교했는데, 홍주 거더리에서 다블뤼 주교와 위앵 신부, 오매트르 신부가 체포되자, 자신을 체포하지 않는 포졸들에게 직접 주교를 따라가겠다고 당부해 함께 서울로 압송됐다고 전해진다.
포도청의 신문과정에서도 황석두는 ‘대군대부’인 천주를 배반할 수 없다고 자신의 신앙을 증거 했으며, 3월 23일 사형선고를 받고 같은 달 30일, 충남 보령의 갈매못으로 이송돼 목이 잘렸다. 당시 그의 나이 54세였다.
이후 황석두의 형의 아들이자 양자였던 황천일(요한)이 그의 시신을 거두어 본가로 옮겼다가 홍산 삽틔에 장사지냈다고 전해진다. 1968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됐고,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돼 현재 한국의 103위 성인 가운데 한 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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