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 음력 6월 28일 정조(正祖)가 재위 24년만에 승하하였다. 천주교에 대해 온건한 정책을 펴던 그의 죽음은 천주교와 남인들에게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純祖)가 11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궁중의 어른이었던 대왕대비 김씨가 섭정(攝政)이 되어 정사를 마음대로 처리하게 되었다.
대왕대비는 원래 노론 벽파에 속해, 정권을 잡자마자 반대파인 남인 시파와 천주교 신자들을 물리치려 했다. 장례예식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그녀는 11월 하순에 시파 사람들을 몰아내고 벽파 사람으로 채웠다. 그러자 이어서 천주교를 박해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해 12월 17일(음) 최필공이 다시 체포되는 것을 신호로 삼아 최필제와 오현달 등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당해, 불안하던 염려는 마침내 1801년 1월 10일(음) 대왕대비의 금교령이 내려지면서 현실로 변하고 말았다. 이렇게 시작된 신유박해는 한국초대교회 거의 모든 지도자들을 순교나 귀양으로 상실하게 하였다. 이제 이 박해 때의 순교자들을 차례로 살펴 보고자 한다.
최필공(崔必恭·토마스, 1745~1801)은 서울의 중인계급으로 궁중 의관(醫官) 집안출신이었다. 최필공이 벼슬을 얻지 못하자 몸시 가난하게 살았는데 그는 너무 가난하여 나이가 찼으나 혼인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솔직하고 너그러운 그의 성격이 천선적으로 착하고 진실되어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고 신뢰를 받았다.
1790년 그는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하였다. 그는 입교하는 날부터 크나큰 열성으로 영혼 구원의 일만 생각하여, 육신에 대해서는 필요한 것을 돌보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때가 많았다. 그의 열정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면서 두려움도 없이 천주교를 공공연히 전파하였다.
그는 때때로 한 길 가운데 군중속에 멈추어 서서 『천지의 큰 임금을 반드시 섬겨야 합니다. 만물의 위대한 주를 어찌 섬기지 않겠습니까!』하고 외쳤다. 그는 아마도 우리나라 가두선교의 효시로 일컬어도 좋을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그 무렵 그의 열성은 비록 그가 새로 입교한 신자이기는 해도 가장 열심한 신자 중의 하나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듬해인 1791년 신해박해로 용감한 가두선교자 최필공은 형조에 끌려가 모진 신문을 받게 되었다. 그는 『사람은 누구나 천주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저는 언제나 천주께 대한 본분을 다할 용의가 있습니다』하고 용감하게 대답한 뒤에 그에게 가해지는 어떤 형벌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한결같이 신앙고백을 되풀이하여 마지 않았는데 어떻게나 순진하고 솔직하며 확신에 찬 모습으로 말하였던지 모던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그의 순진무구한 확신은 마침내 정조 임금께 알려지고 정조는 최필공의 목숨을 보존하여 주고자 하였다. 그래서 정조는 그를 회유하여 몇마디 굴복하는 말만이라도 얻어 내도록 하는데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형조는 갖은 유혹으로 그를 회유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정조는 마지막으로 최필공의 옥에 늙은 숙부와 동생을 들여보내 눈물로 간청하게 하여 이 용감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했다. 최필공은 사람으로서 만가지 회포와 감개에 북바쳐 가슴 메이는 슬픔을 느꼈다. 그 쓰라린 고통 가운데서 우리의 증거자는 참혹하게 울면서도 참 임금이시요, 참 아버지이신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단호히 그의 태도를 밝혔다.
형리들은 이제 오직 준엄한 사형판결 건고만 남았음을 알면서도, 정조의 의도와 그들 자신마저 저 용감한 최필공의 자세에 감복하여 최필공이 임금의 뜻에 순종한 것처럼 했다고 거짓을 아뢰었다. 정조는 최필공의 목숨을 보존하게 된 것을 크게 기뻐하며 곧 그에게 의관의 집안에서 얻을 수 있는 좋은 자리를 주게 하고, 집을 마련해 주며 장가도 들게 해 주었다. 그러고도 정조는 거듭 최필공이 굴복하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최필공이 이 세상에서 누린 세속적 행복은 이 짧은 기간이 전부였다. 그는 비록 거짓일지라도 배교의 대가로 얻은 세속적 복락에 대해 이내 무섭게 회개하였다. 그는 자기의 죄를 몹시 슬퍼하고 회개하여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 지켜 나갔다. 이로 인해 그는 1799년 다시 형조에 불려가 신문을 받고 이번에는 정조 앞에서 천주교가 참된 진리임을 웅변하였다.
정조는 극형을 주장하는 형조의 요청을 무시하고 그를 석방시켜 주었다. 최필공의 순진무구한 신앙고백은 그렇게 정조의 신임과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자 최필공이 가장 먼저 체포되었다. 그리고 그는 1801년 2월 26일(음) 정약종, 이승훈 등 다섯 명의 교우들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으로 갔다. 망나니는 아직 경험이 적어 그의 목을 단번에 치치 못했다. 첫번째 칼에 상처만 났다. 최필공은 조용히 손을 들어 자기 상처에 갖다댔다. 피가 흥건히 젖은 손을 떼어 주의 깊게 들여다 보며 외쳤다.
『보배로운 피!』
과연 그 피는 보배로웠다. 그 피는 순교의 피요,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씨앗이 되는 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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