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려는 정부의 계획에 강정 주민을 비롯해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반대하고 있다. 이들은 정부가 앞장서서 자랑하고 홍보하는 제주의 자연 유산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 이를 치명적으로 훼손하는 청정 해역의 군사기지화를 반대한다.
정부는 제주가 유네스코에 생물권 보전지역, 세계 자연유산, 세계 지질공원으로 등록돼 트리플 크라운이라고 자랑하면서, 또 세계 자연보전 총회를 내년에 유치한다는 의지를 내세우면서도, 제주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자연이 보존된 강정 앞바다의 해저를 준설하고 콘크리트로 제방을 쌓아 수십 척 군함이 정박하는 군항을 만들려는 이율배반적인 결정을 내리고 있다.
해군기지 건설 반대 두 번째 이유는 강정이 해군기지 후보지에서 결정되는 과정과 절차가 너무 비민주적이고 탈법적인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주민들 의사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추진되었기에 용납할 수 없다고 한다. 또 38선에서 제일 먼 남녘 해안에 해군기지를 건설해야하는 이유도 동의하기 어렵다고 밝힌다.
이와 함께 강정에 해군기지 건설이 추진된다면, 최근 갈수록 심화되는 아시아에서의 미·중·일 안보 경쟁 현실을 감안할 때 제주는 동북아 새로운 군사적 긴장의 전초기지로 탈바꿈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우려가 크다.
이 모든 반대 이유에 공감하면서도 제주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면 안 되는 또 하나의 근원적인 사유를 알고 있다. 그것은 제주의 역사와 제주도민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진 상처 때문이다.
정부는 제주도에 새로운 군사기지 건설에 앞서 정부가 수립되는 1948년 즈음에 발생한 4·3사태를 상기해야 할 것이다. 제주도민 대부분은 4·3사태에 대해 가슴속 밑바닥에 씻어지지 않는 깊은 상처와 한을 안고 살고 있다. 국가의 이름으로 공권력이 민중 봉기 진압 작전에 투입돼, 무장 투쟁을 벌인 이들뿐만 아니라 민간인 남녀노소를 무차별 연행하고 정당한 재판 절차 없이 집단 학살하거나 처형했기 때문이다.
역대 한국 정부는 4·3사태를 좌익 폭도들의 봉기라고 규정하고, 50여 년 동안 이에 대한 상세한 조사나 언급을 용납하지 않았다. 따라서 대부분 한국 국민들은 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1948년 4월 3일 제주 여러 지역에서 남로당 세력이 무장 투쟁을 주도하기 시작, 미군정이 국방 경비대를 파견하는 것으로 불거진 4·3사태는 6·25전쟁 이후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된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의 세월을 두고 제주도민 3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 제주도민이 28만 명 정도였으니 10%가 넘는 이들이 희생된 셈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제주도민들이 살기 위해 제주를 떠났고, 일본에까지 도망친 기록을 보이고 있다.
4·3사태는 남로당 무장 세력이 경찰서를 습격하면서 시작됐지만 그 대응 과정에서 국가 공권력이 무장 세력 이외의 민간인들을 정당한 재판 없이 무차별 학살한 것은 ‘제노사이드’(Genocide·특정 집단을 절멸시킬 목적으로 구성원을 대량 학살하는 행위 - 편집자 주)에 준하는 범죄다. 전시라 해도 민간인을 집단으로 학살한 사건은 전쟁 범죄에 해당하고 국제 사회에서도 그 책임은 반드시 묻게 돼 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들은 당시 나치 만행을 적극적으로 저지하거나 유다인들을 보호하는 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외면하였음을 반성하고, 강제 수용소들을 복원하며 후손들에게 과거의 범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펼쳐왔다. 유럽 가톨릭교회도 당시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저지하지 못했음을 반성하며, 프랑스 주교회의 경우에는 지금도 동유럽 지역에 산재한 수많은 유다인 학살 터를 발굴하여 사실을 확인하고 기념비를 세우는 등 속죄의 징표를 행동으로 보이고 있다.
한편 대한민국은 자국민 3만 명이 집단 학살되었음에도 50년 동안 침묵을 강요하며 진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서 99%의 국민이 이에 대해 아는 바도 없고 수많은 동족 희생에 대해 아픔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가톨릭교회도 지금까지 4·3사태의 비참한 역사를 한 번도 온전히 성찰한 적이 없다.
다행히 2000년 8월 28일 정부의 공식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발족됐고, 국가 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자 발생에 대해 대통령이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사과문을 발표했으나, 50년 이상 현대사에서 잊혀졌던 사건이 사과문 발표 한 번으로 복원될 수는 없다.
과거의 기억을 포기하면 우리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에 어둠이 있고 실패가 있어도 그 기억을 통해 다시는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다짐, 또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려는 결단을 통해 우리는 인간으로 세상에 온 사명을 완수한다.
오늘날 지구 어느 곳에서나 인간의 존엄한 인권이 고귀한 존재로 성장해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고통과 상처 속에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에 대한 기억을 후손들이 되살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의 과오를 망각하고 그 과오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성과 윤리를 갖춘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3만 명에 달하는 무고한 생명들의 억울한 희생을 망각의 무덤 속에 파묻고 거기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다면 그들 희생은 무의미한 죽음이 되고 만다. 제주의 땅은 4·3사태의 희생을 거름으로 참된 평화의 섬이 되어야 한다. 무고한 이들의 피로 물든 이 섬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군사 기지를 세우는 것은 희생자들 무덤을 짓밟는 행위요, 그들 죽음을 무위로 돌리는 행위다.
그들의 희생을 뛰어넘는 평화를 창출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도약의 기회를 상실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주는 제주도민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전체를 위한 평화의 섬이 돼야 한다. 그래서 제주를 군사 기지로 만들지 말고 평화의 바위섬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길만이 하느님의 원대하신 구원 역사에 협력하는 길이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에서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명의 무차별 살상을 일으키는 전쟁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음을 선언한바 있고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군비 경쟁은 평화를 보장 못하며 전쟁 원인을 제거하기 보다는 오히려 증대시킬 위험이 있다고, 언제나 새로운 무기를 마련하는 데에 소요되는 엄청난 재원 낭비는 가난한 사람들의 구제를 막고 민족들의 발전을 방해한다고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1968년 바오로 6세 교황도 회칙 「민족들의 발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가난과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서 각국 정부가 경쟁적으로 군비 경쟁에 막대한 재원을 투입하는 현실을 개탄했다.
강정은 기지 건설에만 1조 원 가까운 재원이 투자된다고 한다. 또 그곳에 배치될 수천 억 원 하는 이지스함을 비롯, 첨단 전함들과 거기에 탑재될 고성능 무기들을 합산하며 수조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 천문적인 재정 지출은 과연 국민을 위한 것인가? 오늘날 세계적인 경제 침체와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되는 상황에서 하루아침에 노후 대책도 없이 정리 해고된 이들, 안정된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고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수많은 저소득층 국민들의 고통과 좌절을 못 본 체하며 이러한 무력 증강을 무리하게 추진해야 하는 것인가?
현대의 역대 교황들은 한결같이 군비 축소를 통한 평화를 호소해 왔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백주년」 18항을 통해 “건전하지 못한 군비 경쟁은 각국의 경제 발전과 후진국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필요한 재원을 탕진해 버린다. 인간의 복지에 기여해야할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발전은 전쟁의 도구로 변했다. 과학과 기술은 점점 더 완성된 파괴적 무기의 생산에 적용되며, … 새로운 전쟁의 정당화를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전쟁은 예측되고 준비될 뿐 아니라, 현재 세계 여러 곳에서 유혈 사태를 일으키고 있다”고 밝힌바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현대의 교회가 일관되게 가르치는 이 진리에 귀 기울이고, 가공할 무력이 빚어내는 파멸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나는 강정이 대한민국에 평화의 씨앗을 뿌리고 동북아의 긴장을 해소하는 평화의 마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할 뿐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