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학생 때 읽은 글이 생각난다. 정확한 내용은 떠오르지 않지만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하나의 끈으로 연결된 것에 비유할 수 있는데, 그 관계라는 끈은 죄를 지으면 끊어지게 되고 그 끊어진 끈을 다시 연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회개라는 것이다. 그러나 회개로 다시 연결된 끈의 길이는 이전의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묶여진 부분만큼 짧아지듯이 회개도 하느님과 인간과의 간계를 더 가깝게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히개에 시선을 두라는 이야기였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회개이다.
빌라도가 갈리레아인들을 학살한 사건과 실로암 탑이 무너질 때 열여덦 사람이 죽은 사건을 보면서 「죄와 현재의 불행은 관계가 없다」는 점과 「그들과 우리는 똑같은 죄인」으로서 회개해야 된다는 것, 그들의 죄와 불행을 따지기에 앞서 회개의 요청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화과나무의 비유, 무화과는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3」이라는 숫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회개를 위하여 주셨던 시기를 뜻한다. 그리고 금년 한해는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지는 마지막 회개의 시기를 상징한다. 때문에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예수님을 통해 선포되는 마지막 기회를 높치지 말고 회개하라는 것, 회개의 기회는 한번 더 주어질 수 있지만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 회개의 삶을 시작하라는 것이다.
사실 「회개」라는 주제는 「사랑」과 더불어 예수님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말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사목 현장에서 「회개」라는 주제보다는 「죄」라는 주제에 더 많은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죄」와 「회개」의 중요성을 따지는 것미 마치 닥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처럼 의미 없는 일일수도 있으나, 어느 것에 강조점을 두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기에 이것은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죄』에 강조점을 두는 사람의 태도는 이러하리라. 죄를 지었을 때, 이들이 보이는 첫 반응은 실망과 부끄러움이다. 죄를 지어서는 안되는데 죄를 지었구나. 죄를 인정하기보다는 회피하려는 경향을 가지게 되고, 「용서」보다는 죄 지은 자신과 타인을 책망하게 딘다.
그러나 「회개」에 강조점을 두는 사람의 태도는 이아는 다르다. 이들은 회개란 죄를 전제로 함을 알고 있기에 이들이 보이는 첫 반응은 이니정과 수용이다. 그러기에 자신의 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죄에 대해서 관대함을 가지게 되고, 죄를 인정하기에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다.
아마도 이 두 가지 태도의 차이점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성서의 인물들이 유다와 베드로가 아닐까 여겨진다.
유다, 독입운동가 출신으로 제자단의 돈주머니를 맡아볼 정도의 신임이 두터웠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배반한 동기는 단순한 돈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독립 투사였기에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도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줄 인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는 독립투사로서의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유다는 갈등을 겪게 된 것이다.
『내가 예수님을 잘못 본 것이 아닌가? 그분이 메시아라면 혹시 죽음 앞에서만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것이 아닌가?』예수님의 메시아성에 대한 의심이 예수님을 배반한 동기엿으리라!
그러나 예수님은 유다의 기대와는 달리 당신의 메시아성을 드러내시지 않고 돌아가신다. 유다는 실망한다. 『내가 못할 짓을 했구나.스승을 배반하다니』죄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신의 죄에 대해 자신이 책임지겟다는 마음으로 결국 자살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여기에 비해 베드로. 어부 출신으로 실질적으로 제자단의 으뜸이었던 분. 이분도 예수님의 수난 앞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한다.
그러나 그 이후의 행동은 유다와는 차이가 난다. 그가 한 행동을 성서에서는 『밖으로 나가 몸시 울었다』라고 짧게 기술하고 있다. 왜 울었을까? 성서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아마도 스승을 배반한 자신의 알량함에, 그리고 잘못에 대해 울음으로 밖에 용서를 청할 수 없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그 울음의 의미였으리라.
사소할 것 같은 이 두 가지 태도의 차이는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인간적으로는 유다의 행위가 훨씬 더 인간적이고 호감도 갈 수 있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으로 거듭 태어나지만 유다는 성서에서 가장 버림받은 이로 남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속죄와 회개의 시기인 사순절의 삶의 한 교훈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결연히 죄와 단절하는 삶이 아니라 죄와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베드로의 태도가 우리가 간직해야 할 사순절 회개의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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