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송파구 신천동 11번지 장미아파트 30동 905호.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다. 벌써 3년째. 평생 동안 하느님의 집을 벗어나 살아 본 적이 없었던 나에게 처음에는 낯선 곳이었지만 어느 곳에서든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손길과 섭리 안에 있음을 새삼 느낀다.
세상에서 조금은 거리가 멀어진 노사제의 회고에 귀를 기울일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지나온 이야기를 시시콜콜 털어놓는 것이 계면쩍기도 하지만 그저 이것도 하느님께서 내게 주는 사랑 한 조각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특별한 삶이 내게 어디 있었겠는가. 내가 겪어온 한국 근대사의 그 격랑조차도 당대의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보속의 마음으로 견디어왔을 것이기에.
하지만 그 중에서도 포로수용소 종군사제로 사목한 경험, 서로를 기대어야 견딜 수 있었던 전후 우리 나라에서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시작한 보람, 가톨릭 이민단 지도신부로 브라질에 파견된 체험들은 그 나름대로 색다른 인생사였고 의미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저 사제로서 반백년을, 평생을 살 수 있었다는 기쁨이야 말로 가장 큰 것이리라. 하느님 앞에 무엇이 그리 특별할 것이며 누가 감히 어깨를 펼 수 있겠는가. 사제로서 살아올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로 내 삶의 몇 조각들을 풀어보려 한다.
내가 태어난 곳은 평안북도 신의주이다. 1923년 1월 10일 아버지 장득홀과 어머니 김금녀 안젤라 사이에 삼형제 가운데 둘째로 세상에 태어났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이미 내가 신의주 공립 보통학교 6학년 때 돌아가셨다. 어려서 당한 부모님과의 이별은 어린 내게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조부모와 삼촌, 고모들이 우리 삼형제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우리 집안이 일찍이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미국 메리놀 수녀회 수녀들과 교분을 갖고 있던 둘째 고모 장복려(아가다)의 힘이었다. 굳은 신앙으로 한 때 수도자의 꿈을 키우기도 했던 고모는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부모 없는 아이들을 위해 헌신했고 평생을 내 삶과 신앙의 한가운데 자리했었다.
짧은 사목생활 후 1957년 별세한 삼촌 장선흥(로렌조) 신부. 그리고 나의 뒤를 이어 조카인 서울대교구의 장긍선(예로니모) 신부가 성직의 길을 걸었고 조카 딸 셋이 모두 동정성모회에 입회해 고모의 꿈이었던 수도자의 길을 걷고 있다.
성직의 길을 향한 첫걸음은 신의주공립보통학교 6학년때. 미국 메리놀외방전교회가 운영하던 예비신학교인 성모학교로 유학을 갔다. 평양 서포리에 자리한 이 학교는 주교관 옆에 서 있던 초라한 초가집이었는데 이곳에 도착한 10명의 예비중학생 중에는 광주대교구장을 역임한 윤공희 대주교도 있었다.
1년 동안 소신학교에 입학할 준비를 하고 이듬해 우리는 덕원신학교와 서울의 동성학교로 나눠 진학을 했고 윤대주교는 덕원신학교로 가면서 나와는 헤어져야 했다.
동성상업학교 을과에 진학한 내 동기는 모두 50여명, 그중 사제가 된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선배 중에는 김수환 추기경, 서울대교구 최익철·나상조·김정진·김윤상 신부가 있었고 부산교구장을 지낸 이갑수 주교, 부산교구 은퇴사제 백응복 신부 등이 있다.
나는 성적표에 『잘 싸운다』고 기록될 만큼 모범적인 학생은 아니었고 「사고」도 가끔 치곤 했던 「악동」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의리와 의협심만은 두터웠던 나를 따뜻하게 감싸준 친구들 덕분에 그런대로 학교 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
공부보다는 운동, 특히 축구에 있어서는 수준급이었다. 경신학교, 중동학교와의 시합에도 대표로 출전했고 고향인 신의주시 대표선수로 소련 제5공군 축구팀과의 친선 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동성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원산에 있던 덕원신학교에 입학했다. 일제말 세상은 어수선했지만 모처럼 신학과 라틴어 공부에 열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수세에 몰리고 있던 일본은 젊은이들을 학도병으로 전장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나 역시 평양 44부대로 다른 한국인 50여명과 함께 끌려가야 했다. 기차를 타고 중국 땅으로 향하던 나는 압록강변에 자리한 고향 집을 발견하고 애타는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 상념을 오래 가지 않았다. 기차가 중국 장개석 군의 공습을 받았던 것이다.
폭격으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한 가운데 나는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부대는 다시 양자강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는데 한국인 한 사람이 탈출하는 바람에 그나마 서로 의지가 되던 동포들은 모두 재배치돼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그후 나는 상해 인근의 조현이라는 곳으로 갔다.
하루는 수색을 갔다가 자칫 군인이 아닌 민간인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뻔했다. 그 때의 상황은 내가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과 똑같은 것이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성직을 택했던 내가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공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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