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다 지나가고 나서야 일어났다. 일어나 끼니를 때우고 밖으로 나가 친구들을 만나다보면 어느새 저녁 시간이었다. 그리고 집에 오면 컴퓨터를 켰다. 그렇게 게임과 인터넷을 하며 새벽 2∼3시까지 놀았다. 조영범(17) 군에게 방학이란 그런 하루의 되풀이였다. 친구들도 다 그렇게 지냈다. 그들 사이에서는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이 자기도 모르는 새 자신의 해외봉사 신청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화가 나고 가기 싫었지만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봉사점수를 따 두면 후에 대학갈 때 이득이 될 터였다. 그렇게 그는 제20차 국제청소년지원단에 참가했다.
모이게 된 계기도 달랐다. 나이도 성격도 사는 환경도 달랐다. 서로 다른 18명이 필리핀 갈라완 지역 봉사활동이라는 한 가지 목표 아래 (재)한국천주교 살레시오회(관구장 남상헌 신부) 돈보스코 정보문화센터 소속 국제청소년지원단에 모였다.
제20차 국제청소년지원단은 (사)MGU(Members for Global Union, 말구유나눔회, 이사장 김용인 루카)의 의료봉사와 더불어 필리핀 갈라완(Calauan) 지역의 환경개선, 위생교육, 어린이교육 봉사활동을 실시했다.
▲ 한국의 봉사자들이 찾아와 준 것은 갈라완 아이들에겐 큰 기쁨이었다. 갈라완 아이들이 웃는 모습.
▲ 국제청소년지원단 봉사자들과 갈라완 지역 어린이들이 함께 자전거를 타며 어울리고 있다.
8월 1일. 해외봉사의 첫날은 그야말로 우왕좌왕이었다. 위생교육을 하려했지만 전기시설 문제로 마이크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준비도 많이 하고 연습도 많이 했지만 진료를 받기 위해 모인 수 백 명의 갈라완 주민들을 교육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환경개선활동도 할 수 없었다. 방역에 필요한 소독약과 집집마다 나눠줄 쌀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린이교육이라고 해서 사정이 나았던 것은 아니다. 계속 쏟아지는 비로 운동장에서 교육활동을 할 수 없어 4m² 남짓한 조그마한 방에서 필리핀 어린이들과 간단한 놀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필리핀 어린이들을 위해 준비한 페이스페인팅 도구도, 풍선도 공도 아무것도 이용하지 못했다.
모든 일이 생각했던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필리핀에 오기 전 수차례 모여 준비해왔지만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저녁 9시 평가 시간을 통해 오늘 부족한 점과 느낀 점을 서로 나누며 더 나은 봉사를 할 수 있도록 내일의 계획을 다잡았다.
■ 위생교육활동
“칫솔질 하는 방법을 알려 드릴게요!”
커다란 칫솔로 치아모형을 닦는 시범을 보이며 영어로 설명한다. 전문적인 지식은 없었지만 미리 준비해온 현수막과 유인물을 최대한 활용했다. 유인물 뒷면에는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도 알아볼 수 있도록 필리핀 말인 타갈로그어 번역본도 함께 인쇄했다.
지금까지 많은 단체들이 주민들의 교육을 위해 갈라완을 방문했지만 갈라완 주민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갈라완 주민들은 오히려 “그 교육을 받으면 우리가 먹고 살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하지만 지원단의 마음이 통한 것이었을까? 진료를 기다리는 갈라완 주민들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지원단 학생들의 강의를 경청했다.
▲ 갈라완 주민이 봉사자들이 준비한 유인물을 받고 치아위생교육에 흥미로워하고 있다.
▲ 국제청소년지원단 봉사자들이 올바른 칫솔질을 교육하고 있다.
“Hello! What's your name?”(안녕하세요! 이름이 뭐예요?)
낯선 사람들의 방문에 어린 아이들이 신나서 달려든다. 처음 보는 한국 사람이 재미있기만 하다. 지원단의 명찰에 적힌 영문 이름을 서툴게 따라 읽는가 하면“안녕!”이라며 자신이 아는 유일한 한국어를 뽐내는 아이도 있었다.
갈라완 지역에는 낮 시간에도 유난히 아이들이 많다. 학교에 가있을 시간이건만 학교에 가려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필리핀은 초등학교까지 무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지만 갈라완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갈 수 없다. 학교가 없어서가 아니다. 연필 한 자루, 노트 한 권을 살 돈이 없어서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갈라완 아이들이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일은 별로 없다. 교육은커녕 놀잇거리도 다양하지 않다. 낯선 사람이 방문한 것 자체가 갈라완 아이들에겐 큰 기쁨이었다. 지원단도 자신들을 반겨주는 갈라완 아이들의 모습에 힘이 나 준비해온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림그리기 대회, 페이스페인팅, 풍선아트, 태권도 등의 교육 프로그램뿐 아니라 아이들이 평소에도 즐길 수 있도록 사방치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술래잡기, 공기놀이 등 여러 가지 우리놀이문화도 전했다. 열심히 준비해온 다양한 프로그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어느 교육이고 어느 놀이고 갈라완 아이들의 얼굴엔 웃음이 떠날 줄 몰랐다. 지원단은 여러 가지 놀이를 가르쳐주면서 오히려 갈라완 아이들에게 활짝 웃는 얼굴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매달리는 갈라완 아이들을 상대하느라 어느 새 땀이 송글송글 맺혔지만 지원단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 한국의 전통무술인 태권도를 배우는 시간은 갈라완 어린이들이 가장 즐거워한 시간 중 하나였다. 갈라완 어린이들이 발차기 연습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남을 위해 시간을 써 본 적이 없었다. 봉사도 순전히 자신을 위해서 참가했다. 그러다 보니 지원단 내에서 마찰도 있었다. 하지만 지원단에서 만난 사람들은 지금까지 사귄 친구들과 달랐다. 남을 위해 일할 줄 알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필리핀 아이들에게서도 배려와 감사를 배웠다. 지금까지 해왔던 자신의 생활이 한심했다고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남을 위해 시간을 쓴다는 게 이렇게 기쁘고 좋은 일인 줄 몰랐어요. 나도 이렇게 베푸는 일을 할 수 있구나 하는 걸 깨달았죠. 이제 무의미하게 시간 낭비하면서 살지 않을 거예요.”
※ 후원 758401-04-006021 국민은행 (예금주 (재)한국천주교 살레시오회)
- 국제청소년지원단은
(재)한국천주교 살레시오회(관구장 남상헌 신부) 돈보스코 정보문화센터에 소속돼 있는 국제청소년지원단(Korea Supporters For International Youth)은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전 세계 청소년들을 돕고자 결성한 봉사단이다. 지원단은 2003년 몽골 어린이들을 위한 집짓기 사업을 시작으로 동티모르, 필리핀, 캄보디아, 태국 등 주로 제3세계 국가를 중심으로 봉사활동을 펼쳐왔으며 18차부터는 (사)MGU와 연계, 의료·환경개선 사업에도 힘을 쏟고 있다. 지원단은 빈곤지역 청소년들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문화 교류 등을 통해 현지 청소년들에게 자립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과 동시에 한국 청소년들에게는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는 나눔의 소중함을 체험하고 성장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