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한겨레 21」이란 잡지에 흥미로운 주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진리가 오류를 관용해야 하는가?」하는 문제였다. 저자인 이상수씨는 종교적 진리의 관점에서 『내가 알고 있는 명명백백한 진리 때문에 행해져 온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보면서, 종교적 신념 뿐만 아니라 사회 과학적 진리와 자연과학적 진리마저도 명백히 오류라고 여겨지는 논리에 대해서조차도 일단은 관용해야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명백한 오류로 여기는 1+1=3임을 고집하는 사람에 대래서조차도 서로 같은 판단기준을 공유하고 있다면 그와 대화해야 하고, 만일 판단기준이 다르다면 먼저 판단기준에 대해 토론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주장하기를 진리가 오류를 관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인류의 사유와 문화를 더욱더 풍요롭게 할 수 있고 새로운 사유의 길을 찾아낼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잃은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의 비유이다. 아마도 복음서 중에서도 강도 만난 사람의 비유와 더불어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반향을 일으키는 이야기이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간간하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상속받아 그 재산을 다 탕진하고 난 후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고, 인자하신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받아들이고 잔치를 베푸는데 큰아들이 못 마땅해 한다는 이야기이다.
간단한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나오는 큰 아들가 작은 아들이 누구인가 하는 점과 오늘 복음의 중심이 누구인가를 안다면 오늘 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오늘 복음의 중심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 한때는 이 비유를 탕자의 비유, 잃었던 아들의 비유라고 하여 작은아들에게 초점을 맞추기도 했으나 어디까지나 이 비유의 중심은 방탕한 아들이나 그의 회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의 중심은 다름 아닌 아버지이다. 돌아오는 작은 아들을 반기는 아버지의 모습과 불평하는 큰아들을 설득하는 인자하신 아바저의 모습이 바로 오늘 복음의 중심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큰아들과 작은 아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인데 이 문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신 계기와 그 뜻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다. 오늘 복음 전반부에도 나오지만 예수님이 이 비유를 이야기하신 목적은 자주 죄인들과 어울리고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하며 못마땅해하는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의문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의 큰아들은 스스로 의로운 체하는 바리사이와 율사들을 의미할 것이고, 복음의 작은 아들은 세리와 죄인들의 무리로 보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때문에 오늘 복음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의미는 첫째로 하느님은 죄인을 멀리하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들을 반기시는 분이라는 점이다.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다가 먼저 달려가 포옹하는 아버지. 아들의 죄 고백을 채 끝내기도 전에 큰 잔치를 베푸는 자비의 아비지이시다. 「돌아온 죄인을 당신의 사랑으로 덮어 주시는 것, 과거의 모든 일을 잊으시고 죄로 생긴 빚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죄인을 전보다 더 잘 대해 주시는 분」임을 이 비유는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바로 하느님은 죄인을 멀리하지 않으시고 회개를 기뻐하시는 분이라면 이제 우리는 「극단적인 죄에 대한 민감성」은 자제되야 한다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작은 아들의 모습」의 인정과 「하느님을 향한 방향전환」이것이 실천이 하느님의 큰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교훈은 큰아들인 바리사이와 율사들도 하느님의 이 기쁨에 동참해야 한다느 것이다. 바리사이와 율사들이 하느님의 이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죄와 회개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가치관과 죄를 포용할 수 없는 옹졸함 때문일 것이다. 율법의 자구적 해석과 철저한 준수만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그것을 진리로 믿고 있었기에 이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세리나 창녀와 소위 그들의 관점에서 본 죄인들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의 반대편에 선 것은 그들의 윤리적 선악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하느님관과 죄와 회개에 대한 생각의 차이였으리라. 이점을 보면서 바리사이들이 율법에 대한 열정과 더불어 진리도 오류를 관용해야 하는 좀더 넓은 관용의 정신, 「자기가 동의하지 않는 생각을 용인하고 견디는 똘레랑스」의 정신이 없음에 대한 아쉬움과 옹졸한 큰아들의 모습이 오늘도 계속되는 현실 앞에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성급하게나마 결론을 내려본다. 우리도 인자하신 아버지를 본받아 죄와 잘못에 대해 좀 더 넓은 관용의 정신을 가져 보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는 이 관용의 자리가 하느님의 자비와 이웃의 만남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새로 태어남」의 신비를 맛볼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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