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땅 조현에서 일본군 부대에 있던 나는 나중에 항주로 나와 무장해제를 했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해방이 된지 몇 달이 지난 때였다. 광복군에 입대해 한달 정도 지난 뒤 광복군은 해체됐고 나는 한국 국적의 일본군 포로로 중국군에 붙잡혀 수용소 생활을 해야했다.
마침내 수용소에서 풀려나 부산으로 내려온 나는 광복군 모자에 일본 군복을 입고 있어 참으로 가관이었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 동성학교로 가서 귀환을 알린 후 평양으로 향했다. 하지만 해주 쯤에서 러시아군에게 붙들렸고 또다시 포로로 사리원에서 석탄 옮기는 일을 하다가 간신히 풀려나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를 만나 귀환소식을 전하고 신의주행 기차에 올랐다. 고향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이번에는 북한의 보안대에 체포됐고 사흘만에 풀려난 나는 그제서야 꿈에도 그리던 고향집에 도착했다. 참으로 멀고도 험한 길이었다. 그리고 1947년 원산의 덕원신학교에 복학해 학업을 계속했다.
해방으로 격동의 세월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북한 공산주의 세력은 공산화를 추진하면서 교회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말 평양시 인민위원회는 평양교구 주교좌 관후리성당을 내놓으라는 전갈을 보내왔고 홍주교가 피납됐다. 이를 시작으로 북한 교회의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잇따라 체포되거나 행방물명됐다.
1949년 12월 10일 관후리성당이 몰수됐고 사제와 수도자들은 급히 몸을 피해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신학교에서도 신학생들에게 서울로 내려가라고 지시했고 이에 따라 나 역시 남하, 혜화동 대신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했다.
민족의 비극인 한국 전쟁이 시작됐다. 용산신학교에서 하루를 보내고 나니 한강다리가 파괴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다리가 끊어져 건널 수가 없었기에 철로를 걸어 무작정 남으로 향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봇짐을 들고 피난길에 올랐다. 수원역에 도착해 간신히 열차를 집어탔고 무사히 부산에 도착했다. 참으로 다행하게도 그곳에서 황해도 연안에서부터 피난 온 고모와 할머니, 삼촌 장선흥 신부, 그리고 김영식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미군 병원선에 들어가 복사를 하면서 군목신부들을 돕던 나는 서울의 대신학교로부터 부제반은 모두 대구로 모이라는 전갈을 들었다. 이에 따라 대구 유스티노 신학교에서 다시 성직을 향한 공부를 계속했다.
그해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됨에 따라 나는 서울로 올라와 사제 서품을 위한 마지막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2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나의 사목표어인 로마서 11장 36절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토록 영광을 그분께 드립니다』라는 말씀대로 평생을 오직 그분만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하게 청원했다.
첫 임지는 평양교구 진남포본당의 보좌였다. 하지만 아직도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진남포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당시 평양교구장 서리로 유엔군 군목으로 활동하고 있던 미국 메리놀외방전교회 캐롤 안 주교 덕분에 미군 군용비행기를 얻어 탈 수 있었다.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탄 나는 요동치는 기체 안에서 구토를 하고 초죽음이 됐지만 어쨌든 일단 평양에 도착해 평양교구 주교관에 머물면서 진남포까지 갈 수 있는 방도를 모색하고 있었다.
사흘 뒤 중공군이 밀려 신의주에서 다시 밀려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임지에는 발을 디디지도 못한 채 나는 다시 후퇴하는 유엔군과 함께 지프를 타고 서울로 내려와야 했다. 결국 첫임지였지만 발을 디디지도 못한 진남포성당. 남북한의 왕래가 자유로워지면 가장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이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서울이 위험해지면서 나는 다시 제주도로 피난을 가야했다. 제주도는 아름다운 풍광을 간직한 채 전쟁의 참상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쏟아지는 피난민들이 거주할 수용소를 마련하느라 이리저리 뛰어야 했다.
제주읍에 임시 수용소를 설치하고 천막을 구해 숙소를 마련하고 미국의 구호물자를 배급하는 일이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이었다. 함께 피난을 간 다른 신부들도 제주도 현지 본당 신부들을 도와 피난민 구호에 여념이 없었다.
한 달 정도 구호활동으로 정신이 없던 나는 새로운 소임을 받아 제주를 떠나야 했다. 나의 다음 사목지는 「거제도 포로 수용소」였다. 직책은 「유엔군 포로수용소 보조 군목」. 거제도 북쪽 해안 독봉산이라는 야산 아래 자리잡고 있던 수용소에는 천막 수백채가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철조망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수용소는 바깥 세상과는 철저하게 차단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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