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으로서 복음성서를 맨 처음 읽은 사람은 문헌상으로 광암 이벽이다. 그러나 이 복음서를 최초로 한글로 번역한 사람은 호를 관천(冠泉)이라 부르던 최창현(崔昌顯, 요한 1759~1801) 총회장이다. 그는 한자로 된 복음서의 발췌본인 성경직해(聖經直解)와 성경광익(聖經廣益)에서 최초의 한글 성서라 할 한글본 「성경직해」를 번역해냈다.
한글본 성경직해는 한문본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을 한글로 번역한 것인데 위 두 권의 한문본 중에서 당시 한국의 교회생활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탱해서 한 권으로 편찬한 것이다. 그래서 한글본 성경직해를 한때 「성경광익직해」라 부르기도 했다. 한글본 성경직해에는 86개에 달하는 연중 주일과 축일의 복음 구절이 한글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성서의 전체적인 번역은 아니다. 그러나 이 한글본에 실려 잇는 분량은 4복음서 전체의 구절 총 3709절 중에 30.68%에 해당하는 1138절이다. 초대 한국교회 신자들은 이 한글본 성서직해를 통해 우리말 성서를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은 최창현이 번역한 성경직해를 손으로 옮겨 적은 필사본으로 읽었는데, 1801년 신유박해 때 이름 없는 한 여교우의 집에서 압수한 천주교 서적 중에서 이 책이 나오고 있었음이 「사학징의」의 기록에 있는 것으로 보면 일반신자에게까지 얼마나 널리 읽혀졌던 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최창현은 성서의 첫 번역자이지만 더욱 그를 기억하게 하는 것은 그는 한국 초대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총회장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양 초전골의 중인 출신이다. 그가 비록 중인 출신이지만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쓰며 견문을 넓혔고, 조용한 성품에 매우 슬기로웠으며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젊은이로 자라났다. 그는 광암의 권고로 복음선포가 이루어지던 해인 갑진년(1784년) 겨울에 입교한 후 한결같은 신앙생활로 당대 가장 존경받는 덕망 높은 총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황사영은 그의 백서에서 그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총회장 최창현은 을묘년에 순교한 최마디아(최인길 회장)의 족질인데 그의 집안에는 진실한 교훈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성교가 이 나라에 들어오자 남보다 먼저 입교하여 평화롭게 몸을 삼가고 공명하게 힘쓰기를 20년 동안 하루같이 하였습니다. 그는 보기에도 순수하고 말이 간단하면서도 옳았으며, 누가 혹 의혹이 생기거나 환난을 당하여 몹시 근심스럽고 답답할 때에는 그의 얼굴만 한번 보아도 자기가 당하고 있는 일이 그다지 큰 일도 아니요 어려운 일도 아님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몇마디의 말만 들으면 가슴이 시원하게 활짝 열렸으며, 도리에 대한 강론은 자세하고도 분명하여 깊은 맛이 있으므로 비록 예사로 말하고 듣기 좋게 말하려고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 즐겨 듣고 싫증이 나지 않아 사랑믜 마음 속 깊이 들어가므로 듣는 사람에게 신령스러운 이익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의 천명에 순종하고 겸손함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왔으며 남보다 뛰어나게 다른 점도 없었고 또한 험잡을 행동도 없었습니다. 덕망이 교우들 가운데 제일 높았으므로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관아에서도 최창현이 뛰언나 지도자로 교인의 영수임을 알고 체포하고자 했다. 그는 박해가 크게 벌어질 것을 예감하고 교우의 집에 피해 있었는데 신유년(1801년) 정월 초다세날 몸이 불편하여 집으로 돌아와 조리하였다. 그런데 밀고자 김여삼이 이를 염탐하고 포도부장을 인도하여 아흐렛날 밤중에 덮쳐 체호 당하게 되었다.
최창현은 그의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옥고를 치르며 형벌을 받았는데 모진 매를 맞을 때는 기절하여 땅에 엎드려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그러나 매질이 끝나고 관리가 죄목을 헤아리자 벌떡 일어나 십계명을 강론하여 밝혔다. 관리가 제4계에 부모를 효도로 공경한다는 대목서 『네가 부모를 공경한다면 어찌하여 제사를 지내기 않느냐』고 따지자 그는 『잘 생각해 보십시오. 밤에 잘 때에는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맛볼 수가 없지 아니하오. 하물며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겠소?』하고 되물으며 천주교는 부모를 결코 그렇게 허례허식으로 공경하지 아니한다고 했다. 포도청 심문과 금부에서 자신의 신앙을 용감히 증언한 그는 총회장답게 형리들 앞에서 십계명을 강론하고 호교론을 적어서 관리들에게 제출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의 순교의 피로 그 강론과 호교론이 주님의 진리임을 증거하였다.
덕망이 높아 그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양반출신들도 그를 존경하며 따르던 총회장 최창현은 교회창립 당시 신자로 사제가 없던 때 평신도에 의해 형성되었던 임시교단의 일원으로 임시성사 집행에도 선임되어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활동이 잘못임을 알고 즉시 중단하면서 사제영입운동에 협력하고 주문모 신부 입국후에는 신부의 사목활동을 총회장으로서 충직하게 도왔다. 덕망이 교우들 가운데 가장 높던 그가 최필공 정약종 홍낙민과 함께 1801년 4월 8일(양) 순교의 빛나는 영광을 얻었을 때 그의 나이 43세의 장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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