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아버지는 이미 한 번 옥고를 치르고 난 아들이 천주교에 다시 열중하는 모습을 보고 몹시 걱정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을 천주교로부터 떼어내려고 갖은 노력을 다 했다. 최필제는 아버지의 만류가 있을 때가 가장 괴롭고 힘들었다. 그는 지극히 공손하고 온유한 태도로 천주공경이 참되고 올바름을 간절히 설명하며 함께 신앙생활 하기를 오히려 청하기까지 했다.
서울의 중인 출신으로 자를 자순(子順)이라 했던 최필제(崔必悌, 베드로, 1769~1801)는 일찌기 길거리에서 열정에 북바쳐 『주님을 믿어야 한다』고 외치던 순교자 최필공의 사촌동생이다. 그는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약장사로 생업을 삼아 부모를 봉양하여 살았는데 효성이 지극한 그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약제를 다루어 약값이 싸고 질이 좋다며 모두 그를 더욱 신임하였다.
그리고 타고난 성품이 참되고 온후하였는데 그 진실하고 충직하며 중후한 성품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서 바라보기만 하여도 그가 어진 사람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최필제는 1790년 내포의 사도라 불리던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하여 최필공과 함께 활약했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 일어난 신해박해 때에 사촌형과 함께 체포당하여 그만 배교하고 풀려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후 한동안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냉담하였다.
그러던 그는 신해박해 이후 비참한 상태에서도 굳건한 신앙생활을 하며 눈물겹게 사제영입운동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차츰 자신의 불성실을 뉘우치기 시작했다. 1793년경 다시 교회의 품으로 돌아온 그는 옛 동지들의 외롭고 힘겨운 활동에 동참했고 이윽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해 사목활동을 펼 때 정약종 황사영 등과 함께 더할 수 없이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러한 자식의 모습이 염려스러워 기회 있을 때마다 만류했는데 한번 배교를 뉘우치며 새 삶을 시작한 그는 가장 고통스러운 혈육의 탄압을 놀라운 슬기와 의지로 이겨내며 자신의 굳은 신앙의지를 힘있게 느끼게 하였다. 그는 가족의 탄압을 오히려굳고 심원한 신심을 공고히 하는 계기로 삼고 더욱 열절한 사랑으로 가족에게 성실하여 참 사랑의 계율을 아름답게 실천해 갔다.
축첩의 폐습과 남존여비의 일상화된 관습을 버리고 아내를 정중하고 사려 깊게, 한 인격체로 대하며 사랑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적 사랑과 평등으로 부부애를 이 땅에 실현해 낸 첫 효시라 할만 했다. 이러한 그의 삶을 주문모 신부가 보고 탄복하였다. 신부는 그를 칭찬하여 『부부가 정절을 지키며 훌륭하게 끝을 맺는 이가 아주 드문데, 이 부부는 지조가 갈수록 궅어지고 고통을 이겨 주님께 공을 세우는 일에 부지런하니 참으로 어진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사촌형 최필공도 최필제를 언제나 존중하고 두려워 했다. 나이가 어린 아우뻘이지만 모든 일을 그와 의논하여 행하고 한 가지도 마음대로 처리하지 않았다. 최필공에게 한상 천주교를 헐뜯고 배척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는 천주교 신자들을 모조리 돌아가며 욕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도 그의 사촌인 최필제에 대해서만은 감히 흠잡아 말하지 못했다. 오히려 오히려 최필제의 자를 부르며 『천주교에서 취할만한 사람은 오직 자순 한 사람 뿐』이라고 칭찬했다.
신유박해의 기운이 감돌고 그의 사촌 형이 잡혀간 이틀 뒤 주님봉헌대축일을 맞아 이른 새벽 한길 가에 있는 약방의 안쪽 방에 몇 사람의 교우들과 함께 모여 축일 기도를 바치다가 포졸에 발각되어 오현달과 함께 잡혀 관아로 끌려갔다. 그는 옥중에서 배교를 강요당하고 형벌을 받았지만 그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동료를 곱라하라는 어떤 유혹과 위협에도 오직 침묵하며 의연하여 오히려 관리들을 감복하게 하였다.
그는 옥중에서 그의 종형이며 신앙의 동지인 최필공 토마스를 만나 함께 옥고를 치르며 서로 격려하였다. 그러던 중 최필공이 먼저 정약종 등과 함께 순교하자 그의 순교에 대한 열망이 더욱 굳어졌다.
그때 그의 늙으신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이 옥고를 다시 치르게 되자 너무 상심하여 병석에 누웠다가 세상을 떠났다. 옥중에서 아버지의 부음을 들은 최필제는 지극한 효성으로 애통해 하며 관원에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일시 귀가를 청했다. 당시 조선의 형법에는 이를 허가하게 되어 있었다. 비록 죄인일지라도 일시 귀가하여 상주로서 의무를 행하게 했었다.
허락을 해준 관리는 그의 인품에 감복하여 이번 기회에 상례를 마치고 멀리 도망쳐 생명을 구하라고 넌지시 일러 주었다.
그러나 최필제는 정한 날짜에 돌아왓다. 지극한 효성으로 상례를 마치고 정한 날짜를 어기지 않으려고 무한히 애쓰며 돌아와 국법을 준수하고 또한 공적 신의를 지켰다.
그는 돌아와 아버지가 대세를 받고 돌아가셨음을 기뻐하며 옥중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귀에게 원수를 갚고 전에 백했던 것을 기워 갚기를 원하네. 내 가장 큰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하여 내 머리를 바치는 일이네』
그는 1801년 5월 14일 정철상 등 5명의 교우들과 함께 그의 소원대로 서소문 밖에서 순교의 피를 흘리며 자신을 주님께 봉헌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