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크시내에서 버스로 30∼4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이곳은 1132년 13명의 수도사들이 시작한 시토수도원이다. 한때 200∼300명의 수도사들이 거주하고 있을 만큼 전 유럽 안에서도 명성을 지녔던 곳이다.
▲ 요크 인근에 위치한 파운틴수도원 유적지. 1132년 13명의 수도사들이 시작한 시토수도원으로서 한때 200~300명의 수도사들이 거주하고 있을 만큼 전 유럽 안에서도 명성을 지녔던 곳이나 헨리8세에 의해 수도회가 해체되면서 지금은 흔적만을 남기고 있다.
이 수도원이 문을 닫게 된 것 역시 헨리8세가 영국 국교를 만들고 모든 수도회를 해체한데서 비롯됐다. 역사적으로 Dissolution of the Monasteries(수도원해산) 혹은 the Suppression of the Monasteries (수도원 억압) 이라는 용어를 쓴다고 했다. 그러한 수도원 해체의 주된 이유는 재산 문제였다.
당시 헨리8세는 전쟁으로 인해 국가 부도 위기를 맞고 있었는데 수도원 해산 과정을 거쳐 그 모든 소유 재산을 압류, 부를 축적했다. 파운틴수도원도 국가에 귀속된 후 제일 먼저 지붕부터 뜯겨졌다고 한다. 무기 제조를 위한 원료로 쓰기 위해서였다.
남아있는 파운틴수도원의 광경은 교회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자리로서 뿐만 아니라 신앙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잔영으로 다가왔다. 인간의 뜻과 욕심으로 인해 빚어진 갈등과 반목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보여주는 듯했다.
이어서 순례단은 에이번강 서쪽에 자리 잡은 스트랫퍼드어폰 에이번(Stratford-upon-Avon)을 방문했다. 영국의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태어나고 묻힌 곳이다. 그의 무덤이 있는 홀리 트리니티 성당을 찾았다. 입구에 마련된 한글 안내서가 반가웠다.
▲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무덤이 있는 홀리 트리니티 성당.
▲ 홀리 트리니티성당에 마련된 세익스피어의 흉상.
▲ 성당내 기념품 점에 전시된 세익스피어 모습의 미니어처들.
헨리8세의 영국 국교 설립에 맞서다 참수형을 당했던 ‘유토피아’의 저자 성 토마스 모어의 딸과 사위 역시 캔터베리에서 유명한 레커전트 였다. 가톨릭이 금지된 시대에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며 레커전트로 살았던 신자들. 소신과 용기로 신앙을 지켰던 그들의 이야기가 마음을 울렸다.
다음의 방문지는 옥스퍼드였다. 고딕 양식 탑들과 첨탑들이 높이 솟아 있는 도시로 알려진 이곳. 도시의 건물 대부분이 옥스퍼드 대학교에 속해있는 대학도시다.
순례단은 대학교내 크라이스트처치 컬리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울시 추기경이 세웠던 곳이지만 헨리8세가 수도원 해체후 거둬들인 돈으로 다시 이 대학을 설립했다고 한다.
크라이처치 컬리지는 영국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역대 영국 총리들 중 26명이 옥스퍼드대학 출신인데, 그중 13명이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공부한 것으로 알려진다.
▲ 옥스퍼드대학내 크라이스트처치 대학 경당의 제단화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
그 배경에도 헨리8세가 등장한다. 그는 수도원을 해체하면서 성인들의 스테인드글라스도 모두 파괴하는 행동을 보였다. 그래서 한 신자가 베켓 성인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보호하기 위해 얼굴 부분을 미리 지워 버렸고,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크라이스트처치 컬리지의 식당은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의 촬영지로 쓰였다. 그 이유 때문인지, 특히 청소년 청년들이 길게 줄을 서서 식당 안으로 몰려들었다.
▲ 크라이스트 처치 대학의 학생 식당. 영화 해리포터시리즈가 촬영된 장소이기도 하다.
영국 교회는 종교 분열의 역사 속에 파란만장한 시간을 지녀왔지만 또 그만큼 이미 60년대부터 꾸준히 교회일치 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최근에는 신자들 안에서도 성공회 가톨릭 부부들이 각자의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결혼식이나 유아영세식 등에서 가톨릭 성공회 사제가 동시에 예식을 주례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다문화 가정이 아닌 다종교 가정인 셈이다.
이러한 영국교회의 모습은 앞으로의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교가 나갈 큰 흐름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했다. 또 다종교 시대속 가톨릭교회의 역할은 어떠해야 할 것인지, 신자들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 화두를 던져주는 듯했다.
순례 길에서 목도 됐던 여러 장면들이 상념으로 남았다. 갈등의 역사 속에서도 움터져 나왔던 신앙의 희망들, 이젠 유적지로 남아 영화로웠던 수도원 문화의 그림자만을 남겨주고 있었던 수도원들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