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사는 동네 가까이에 본당 주임신부로 동창 형이 부임해왔습니다. 그리고 그 형은 가끔 전화로 사제관에 놀러오라고 합니다. 그날도 전화가 왔습니다.
“이 더운 날, 뭐해? 수박이나 먹으러 와.”
혼자 방에서 땀 흘리며 이 일, 저 일을 하던 저로서는 머리도 식힐 겸 사제관으로 갔습니다. 사실 수박보다 그 형의 살아온 이야기와 최근에 묵상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석진아, 얼마 전에 신문에서 글을 읽었는데 어떤 건축가가 자기 고백을 하는 이야기였어. 그런데 인상적인 부분은 그 사람이 건축가로서 10년을 지나보니까 이제야 고객이 뭘 원하는지를 알게 되더라는 거야. 처음 건축사 자격증을 땄을 때는 내심 자신은 건축가로서 실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고객을 만나 어떤 집을 지어 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는, 고객의 말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려서 고객이 바라는 것보다 대부분 자신의 생각을 잘 설명해서 고객을 억지로 납득시켰던 경우가 많았대. 그 후에 나름 집을 멋있게 설계를 했는데, 그 고객은 왠지 찝찝한 마음을 가지더라는 거야. 외적으로는 잘 설계되었지만, 사실은 그 고객이 정말 원하는 집이 아니었던 거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그런데 그거 우리 이야기 아냐?”
“맞아. 어쩌면, 그 말이 우리 이야기인 것 같아. 나도 교구 신부로 10년을 넘게 살아왔지만 이제야 신자들의 말이 무슨 말인지 조금은 속뜻을 알겠더라. 하지만 나 역시 사제가 된 후 처음 몇 년간은 마치 내가 ‘인생 전문가’가 된 듯 나를 찾아오는 신자들이 뭔가를 말하고 생각을 나눌 때, 그 속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못 알아듣는 신자들을 탓하면서 그들을 가르치고 훈계하고, 그래도 말이 안 통한다 싶으면 다그치고 야단치고 그렇게 했던 것 같아. 그런데 요즘은 나에게 찾아와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그 분들이 왜 그런 말을 하고, 그 말들 속에 정말 간절히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신자들 역시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돼. 그럴 때마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져. 아무튼 이래저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우리는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가고, 그러면서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사제,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사제를 꿈꾸며 내일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면서 문득 그런 우리들의 변화를 기다려주는 신자들 앞에 우리는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참 고마워해야 할 것 같아.”
한여름의 수박 맛은 정말 달았습니다. 하지만 사제 생활 14년이 지난 동창 형의 자기 고백은 그 불그스레한 한여름의 수박보다 더 붉고 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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