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편 비행기 안에서 홀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넉넉히 주어졌다. 가장 먼저 집어든 글은 세계청년대회를 위해 익혀 둔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사전도, 마드리드 여행안내서도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콜로 2,7)’라는 주제 성구였다. 이 말씀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된 것은 세계청년대회의 일정을 모두 마친 후였다.
본대회에 앞서 프랑스 남부 바욘느(Bayonne) 교구에서 이루어진 홈스테이와 교구대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이었다. 한적한 시골 마을 생장르비유(Saint-Jean-le-Vieux)의 할머님 댁에서 머물었던 3박4일 동안, 언어와 문화가 판이한 지역 주민들과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하나만으로 온전한 소통이 가능했다. 홈스테이 셋째날 참례했던 미사는 바스크(Basque) 말로 진행되었다.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리투아니아 및 우리나라 참가자들이 한데 입을 모아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각국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유일한 공통점 아래 하나로 묶이는 모습이 짜릿한 감동을 주었다. 까미노 데 산띠아고(Camino de Santiago) 순례길의 출발점인 생장피드포르(Saint-Jean-Pied-de-Port)에서 일일 순례 체험을 하며 이 감동은 심화되었다. 2000년 전 복음을 전파했던 야고보 성인의 발자취를 더듬는 길을 족보를 찾듯 신앙의 뿌리를 캐러 가는 느낌으로 걸었다. 아직 내 믿음의 뿌리는 얕고 연약하지만 세계청년대회를 통해 조금 더 튼튼히 뻗어주기를 기도하며 걷고 또 걸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펼쳐진 본대회는 이러한 기도가 이루어지기까지 여러 시련을 거쳐야 한다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가왔다. 마침내 ‘자신을 굳건히 세우’게 되기까지 인내를 요하는 순간순간이 찾아왔다. 40도℃가 넘는 불볕더위, 강당에서의 목 뻐근한 침낭 생활, 가는 곳마다 몰려있는 엄청난 인파 등…. 대회 마지막 날 철야기도와 폐막미사를 드렸던 꽈뜨로 비엔또스(Cuatro Vientos)에는 모래바람과 벼락을 동반한 소나기가 번갈아 찾아들곤 했다. 대회를 치른 엿새 동안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리며 버텼다.
세계 각국의 청년들과 광장에서 어울려 춤추고 놀았던 기억, 가던 길 멈추고 직접 찾는 곳까지 데려다 주곤 하였던 스페인 아주머니들의 미소, 지도를 보고 삼삼오오 메뜨로(metro)를 타고 다니며 미지의 성당과 성지를 찾아다녔던 대담한 호기심 등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왜 이 많은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고생을 마다않고 몰려와 폐막미사에 참례하려고 애쓰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답은 내 안에 있었다.
힘들었던 순간을 인내로 극복하는 과정, 힘들었던 순간을 즐거웠던 순간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에서 나 자신을 단단히 다지고 마침내 굳건히 세웠음을 스스로 확인받는 순간이 바로 이 폐막미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릎을 꿇고 성찬의 전례를 맞이하는 젊은이들의 얼굴에서 나와 비슷한 깨달음의 미소를 보았다고 믿는다.
대회가 끝난 후 사라고사(Zarag oza)와 몬세라트(Monserrat) 성지순례를 하며 이런 믿음은 마음속에 ‘튼튼히 자리를 잡았다’. 수원교구 동료 참가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며 방문했던 몬세라트 동굴에서 조용히 생각했다. 세계청년대회를 통해, 하느님을 믿는 세계의 수많은 청년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닮으며 살아가는 길과 세속적인 가치를 지향하며 살아가는 길 사이에서 크고 작은 갈등을 겪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를 확인함으로써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을 받았다. 믿음은 세계청년대회에 참가했던 모든 젊은이들 마음속에 이미 ‘튼튼히 자리를 잡았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그리고 그 믿음의 씨앗이 대회 후의 일상에도 뿌리를 내리게 되기를 기도한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