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살 나던 1937년 드디어 소신학교인 서울의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진학을 하게 됐다. 내가 다니던 보통학교에서 나와 다른 한 명의 친구가 함께 시험을 치렀는데 나만 합격을 했다. 입학을 위해 할아버지와 상경해 두 번의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함께 입학한 동기는 모두 50명이었는데 나중에 이 가운데 7명만이 같이 사제가 돼 당시 성소의 길을 걷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소신학교 입학 후 곧이어 교장으로 오신 신인식 신부님을 보다 가까이서 대할 수 있게 됐다. 하루는 신부님이 이상한 기구를 가지고 교정을 여기저기 다니시는 것을 보고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뭘 하시는지 여쭤본 일이 있다. 이것이 나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연이 된 수맥탐사에 첫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다. 신 신부님으로부터 수맥탐사법을 배운 후 방학 때 황해도 고향집에 내려올 때면 스스로 고안한 추를 들고 이곳저곳을 누비며 다녔다. 추를 들고 나서면 정말 물자리 근처만 가도 추가 떨리는 것이었다. 처음의 그 감동이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렇게 해서 방학 때마다 물자리를 찾아 우물을 만들게 해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이 일이 소문이 나 먼 이웃마으레서도 나를 찾는 이들이 있어 방학 내내 불려다니곤 했다.
신 신부님은 당신보다 수맥을 잘 안다고 칭찬을 자주 하셨다. 지금도 길을 지나가다가도 수맥이 느껴지니 이것은 타고난 하느님의 선물인가 보다.
시골에서 올라온 소년에게 신학교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호롱불로 어둠을 지우던 고향에 비하면 전기가 들어오는 신학교는 신기하기까지 했다. 손재주가 있던 나는 이때 전기 설비를 처음으로 배워 지금도 웬만한 전기 배선은 물론 음향설비까지 거뜬히 혼자 해낸다. 당시에도 유별난 재주 덕에 교수 신부님들의 방 전기시설을 손봐 드리곤 군것질거리를 상으로 받기도 했다. 제 손으로 해야 맘에 차는 성격은 이후 사목에도 그대로 이어져 고해소의 문짝 하나도 신자들이 드나들기 편하게 이모저모 따져보고 달아야 마음이 놓였다.
소신학교 시절 서품 후배인 김수환 추기경은 도서관지기를 했었던 기억이 난다. 4년간의 소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시작된 2년의 예과와 6년의 본과, 연구과는 배고프던 시절로 기억된다. 지금의 신학교 생활과는 너무도 달랐던 때다. 당시 신학생들은 보통 보리빵 하나로 허기를 지우는게 예사였다.
38선이 그어져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고 나서는 여러 본당들을 돌며 객생활을 했다. 두 달의 방학 동안 본당 심부름도 하고 아이들도 가르쳤던 일은 보람임과 아울러 서글픔이었다. 한겨울에 묵고 있던 본당의 방구들이 꺼져 손수 진흙을 이겨 고쳤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또 두 번을 낙방하면 자동 퇴학되던 때라 방학을 한번 지내고 나면 빈자리가 수두룩하게 생겨나곤 했다.
신학교 규칙이 공동생활을 강조해 셋 이상이 어울려 다니는게 예사였다. 잠자리도 공동이어서 큰방에 4, 5개 학년의 신학생 수백명이 함께 지냇다. 지금처럼 공간이 넉넉했던 것도 아니고 침대가 거의 다닥다닥 붙어있다시피 한 3층에 있던 침실은 별의별 잠버릇을 가진 이들이 많아 웃지 못할 일들도 많았다. 그러나 침실에서는 대침묵이 원칙이었고 이를 어기면 곧장 퇴학이라는 조치가 내려지기 때문에 수백명이 북적대던 침실도 취침시간이 되면 절간이나 다름없었다.
아침미사 때 처음 성당에 들어가는 이가 하느님의 첫 강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우리는 아침이면 1층에 있던 세숫방에 먼저 내려가려고 서두르다 구르기도 하고 다치는 일이 많았다. 또 미사 때 복사를 하는 게 하나의 특권으로 여겨졌는데 나는 선배 신학생이던 전덕표 신부님의 도움으로 누구보다 많이 복사를 했었다.
신학교 때부터 유난히 철학을 좋아했던 나는 철학과목만큼은 꼭 만점을 받았다. 「왜」라는 물음을 통해 존재에 다가가는 학문으로서 철학은 내 삶의 지표를 세우는데 적잖은 도움을 줬다.
드디어 손꼽아 기다리던 사제서품일, 만 13년만의 서품식장에는 고모 수녀님이 유일하게 함께 해주셨다. 힘든 학창시절을 이겨내고 사제가 된 동기 일곱명 가운데 이현종 신부는 6·25때 피난을 떠나지 못해 서품 몇 달 만에 유명을 달리 했으니 두고두고 안타까움이 남는다.
내게 부여된 첫 사목지는 지금의 수원교구 안성본당이었다. 당시 주임으로는 임세빈 신부님이 계셨으니 두 임 신부가 같은데서 사목했던 셈이다. 이름도 없이 「임 신부」앞으로 배달되는 우편물이나 물건이 있으면 난감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목에 맛을 보기도 전인 부임 두 달만에 만난 6·25는 사목자로서 내 길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임을 예고나 해주는 듯 했다.
본당에 계시던 수녀님 두 분을 이끌고 피난길을 나서야 했다. 수녀님들의 고향인 전북 김제를 향해 나섰던 길은 전쟁의 참화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새롭게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나와 같은 세대의 뇌리에 지워지지 않을 크나큰 상처를 안겨준 6·25 통에 지니고 다니던 몇 장 안되던 어릴 적 사진마저 모두 잃어버려 기억을 보완해줄게 없다 보니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늘 안타까운 마음이 새롭게 돋아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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