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시복시성준비위원회(위원장 염수정 주교)가 9월 28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7층 강당에서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을 위한 심포지엄’을 열었다.
‘시복을 위한 핵심주제 : 반역·병사·살인·행방불명’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심포지엄은 대주제에 따른 4개의 주제, ▲황사영의 백서와 시복추진에 대한 검토- 윤민구 신부(손골성지)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과 그 의미- 최인각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안중근의 시복시성 가능한가 : 안중근 생애에 대한 재인식- 황종렬 박사(두물머리복음화연구소) ▲해방 직후 북한의 종교정책과 전쟁 전후 실종된 가톨릭 관계자들- 박태균 교수(서울대학교)에 대해 토론했다.
반역 ▧ 황사영의 ‘백서’와 시복추진에 대한 검토 - 윤민구 신부
법적으로 순교자라 보는데 한계가 있어
대부분 조선신자들은 중국의 경우처럼 조선에 온 서양선교사들도 자신들이 갖고 온 금은보화로 성당을 지은 후 조선의 젊은 인재들에게 과학기술을 전수하면서 부국강병에 기여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황사영은 북경주교에게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박해의 실상을 전하면서, 엄청난 수의 서양 배와 군대를 보내달라는 백서를 썼다. 하지만 백서는 중간에 발각됐고 그는 대역반란죄로 능지처참형에 처해졌다.
황사영의 백서 이후에도 1811년(신미년), 1813년(계유년), 1824년에도 조선 신자들은 대박을 요청했다. 하지만 황사영의 백서의 방안들은 ‘백서’ 이전이나 이후의 조선신자들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생각이었다. 우선 그는 군함 수백 척에 정예군 5,6만과 대포 등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싣고 와달라고 요청했다.
법적 관점에서 황사영의 죽음을 형상적인 순교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신자들이 신심적으로 황사영을 순교자로 볼 수는 있겠지만 법적으로 황사영을 순교자로 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시복시성을 하는 목적 중 하나는 삶을 본받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신자들에게 황사영을 본받으라고 모범으로 제시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는 하느님께서는 ‘영복’이라는 상을 주신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황사영을 시복시성해야 황사영에게 영광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백서’에 나타난 ‘불편한 진실’을 미화시키거나 변명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 될 것이다.
병사 ▧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과 그 의미- 최인각 신부
병사 넘어 순교 정신에 의한 죽음
브뤼기에르 주교의 사인을 도나타 주교는 ‘병의 악화’라고 기록하고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은 여러 가지 병이 그 직접적 원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병사를 넘어선 순교 정신에 의한 죽음이었다.
중국은 물론, 조선에 박해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조선과 중국에서의 박해상황의 연속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는 활동과 운신의 폭이 좁았고, 고통이었으며, 그의 죽음의 원인인 병이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러한 박해상황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임무에 온몸을 바쳐 투신했다. 이러한 목숨을 건 투신으로 쇠잔해져 죽음을 맞은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의 직접적 원인은 박해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해자에 의해서, 박해의 상황에서, 그 박해가 직접적 원인이 되어 병을 얻어 죽었다면, 이 죽음은 병사가 아니라, 순교에 해당하는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을 풍요롭게 바라보고 해석할 수 있다. 그를 증거자로 시복시성을 추진하게 되면, 박해상황에서 그가 보여준 순교자적 삶이나 순교정신으로 목자직을 수행하기 위한 성덕 등은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 증거자의 경우는 지속적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을 통해 드러난 덕행의 영웅성을 밝혀야 한다.
지금까지 브뤼기에르 주교의 죽음을 순교로 보지 못한 것은 우리가 이 점에 대하여 심각한 고민이나 연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살인 ▧ 안중근의 시복시성 가능한가 : 안중근 생애에 대한 재인식- 의병기와 수인기의 목적을 중심으로 - 황종렬 박사
투철한 믿음·조국애는 현대인의 모범
안중근에 대해 논의한 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오해하여 살해한 것이 아니다. 둘째, 안중근은 1905년 초부터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정책이 한국민에게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현실을 역사의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고 성찰하며 도달한 결론에 따라 교육사업을 거쳐 의병항거에 참여,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이토를 저격했다.
셋째,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였다. 안중근은 한국에서 독립의병활동을 하다가 1909년 하얼빈 사건을 일으킨 것이 아니다. 그는 1907년 여름에 간도로 간 후 대한인이자 동아인으로서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밑돌이고 동양의 평화가 한국독립의 요체임을 파악해 이를 자신의 전 존재로 증거했다. 넷째, 안중근은 이토 저격 이후 자신이 저격의 목표로 삼았던 독립과 동양평화를 교수형으로 처형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과 세계에 설득해 갔다. 동양평화를 위한 ‘자기희생’이 이토 저격과 함께 개시돼 교수대에 오름으로써 동양평화를 위한 그의 증거가 완결돼 갔다고 할 것이다.
안중근은 이토를 저격해 한국의 독립을 위해 항거했기 때문에 현대 가톨릭교회의 모범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참으로 현대 가톨릭교회의 모범이자 동아시아 세계 가톨릭교회와 전 지구 사회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고해성사를 통해 정화를 거친 영혼으로 상징되는 갈림 없는 마음으로 이토 저격 이후 일관되게 증거한 그의 믿음과 민중과 조국에 대한 투철한 사랑에 있다.
행방불명 ▧ 해방 직후 북한의 종교정책과 전쟁 전후 실종된 가톨릭 관계자들 - 박태균 교수
희생자 진상 명확히 밝혀 바로 잡아야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가톨릭계 피해자는 크게 두 시기를 통해 나타났다. 하나는 전쟁 중 피해를 입은 종교 지도자 및 신자들이다. 전쟁 시기 피해자는 다시 둘로 나눠지는데 북한군이 남한을 점령하고 있던 시기 남한에서 피해를 입은 가톨릭 관계자들과, 유엔군의 38선 이북으로의 북진 이후 북한군이 후퇴과정에서 납치 또는 피살된 북한지역의 가톨릭관계자들이다. 둘째로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의 피해자들이다. 이들의 연행, 납치 후 행방불명 시기는 대체로 세 시기로 나눠지는데, 1949년 5~7월, 동년 12월, 1950년 6월 24일에 집중돼있다. 덕원·함흥교구가 44명이고 평양교구가 29명이다.
가톨릭 관련 희생자들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거의 없다. 대규모 학살의 경우 신원파악과 시체 수습의 어려움 때문에 가톨릭 계열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압송과정에서, 혹은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사망했을 수도 있다.
이들의 최후 행방을 찾을 수 있는 가장 직접적 방법은 북한에 직접 조회하거나, 국제 적십자위원회의 자료들을 좀 더 상세히 조사하는 것이다.
60년이 지난 현재 실타래를 풀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지점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스스로 전쟁 당시의 결정에 대해서 되돌아보아야 하고, 분단과 전쟁의 과정에서 박해를 받아 희생된 가톨릭 성직자와 신자들에 대한 진상을 좀 더 정확히 밝혀 이들의 위치를 바로잡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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