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잘 알고 지내는 형이 있는데, 그 형의 집에 놀러 가면 작고 아담한 탁상용 십자가가 가장 좋은 자리에 모셔져 있습니다. 이사를 갈 때도 손수 그 십자가를 들고 갔었고, 먼저 그 십자가를 놓을 자리를 생각한 후 가장 좋은 자리에 십자가를 모셔 놓고 이삿짐을 풀 정도로 그 십자가에 대한 애정이 지극합니다.
얼마 전, 그 형의 집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형, 이 십자가, 형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나의 궁금증을 알고 있기나 한 듯 그 형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83년도에 어머니께 선물 받은 거야. 당시 어머니가 다니시던 본당 신부님께서 강론 중에 자녀에게 정말 좋은 탁상용 십자가를 하나씩, 꼭 사주라고 당부를 하셨대. 그리고는 비록 눈에 보이는 십자가지만 자녀들이 그 십자가를 소중히 간직하며 지낸다면 그 십자가는 자녀들의 마음 안에 살아 숨 쉬는 신앙의 힘이 될 것이라고 하셨대. 그 신부님은 자신이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던 계기 역시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선물 받은 십자가 때문이래. 그 후에도 평생 그 십자가를 간직하며 살고 있는데, 당신 자신의 소원이 그 십자가를 쥐고 관까지 가는 것이래. 그러면서 그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이겼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마지막 눈을 감고 싶어 하셨다고 하더라. 사실 나도 처음에는 이렇게 오래 간직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지금은 그 십자가가 있는 곳에 자연히 눈을 돌리는 버릇이 생겼고, 이 십자가를 볼 때마다 왠지 나의 첫 마음들이 생각나고, 힘든 때 이 십자가를 통해 삶의 어려움을 극복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나도 이 십자가의 힘을 믿고 앞으로 살고 싶고, 그리고 죽어서도 그 신부님처럼 이 십자가를 쥐고 무덤까지 가려고.”
예전에 영화 ‘미션’에서 가브리엘 신부님이 ‘무력이 옳다면 세상에 사랑이 설 자리가 없다’며 성체가 모셔져 있는 십자가를 들고 과라니족 원주민들과 함께 정복자의 총, 칼 앞으로 걸어가는 마지막 장면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비록 그 십자가는 단지 눈에 보이는 십자가였지만, 그 십자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것들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표징과 상징’이 보여주는 ‘힘’입니다.
탁상용 십자가, 단지 눈에 보이는 ‘성물’이겠지만 그 ‘성물’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세상’과 맞설 수 있게 해주는 생생히 살아있는 힘이 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물, 진심으로 소중히 간직할 때 그 성물은 ‘물건’이 아니라 생명력 있는 힘이 됩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