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김성태 신부)가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맞아 9월 29일 오후 1시30분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7층 대강당에서 개최한 「신유박해 200주년 교회사 국제 심포지엄」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세 나라 교회가 겪었던 초기 수난사를 비교사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초기 교회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한 자리였다. 한·중·일의 교회사 관련 학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동아시아 천주교의 수용과 박해」를 대주제로 열린 이번 심포지엄은 특히 각 국의 정치 지형에 따라 이뤄진 교회 박해사를 돌아봄으로써 신유박해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주었다. 아울러 중국과 일본 등 다른 나라 교회의 초기 박해사를 새롭게 이해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초기 교회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연구의 전기를 마련했다.
▷발제 강연 : '가톨릭 신앙의 동점(東漸)과 동아시아 전통 사회' - 이원순(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 서울대학교 명예 교수)
신앙 전파 특성 보편 개별 공유
16세기를 전후한 「지리상의 신발견」을 계기로 이후 1세기 동안 「대항해 시대」가 열린다. 유럽 선발 식민주의 국가에 의해 이뤄진 「유럽 세계의 확대 운동」은 동방세계에 「서구 충격」을 가하는 역사적 조류였다. 이 조류를 타고 그리스도교 신앙이 동아시아 3국에 와 닿게 된다. 동아시아 전통 사회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등장은 서구의 「역사적 도전」에 대한 전통 사회의 「역사적 응전」을 낳았다.
가톨릭 신앙의 동점은 단순히 전통적 종교와 다른 새로운 신앙의 전달만이 아니라 종국적으로는 그 신앙에 기반한 사고와 행위, 생의 변화를 촉구하는 역사적 가치 체계의 전달이며 실천을 요구하는 역사 전개이기도 했다.
유학과 한자를 공유한 동아시아 전통 문화권에 속한 한·중·일 3국에 대한 그리스도 신앙의 전파는 전통 사회의 기반이 달랐기에 「역사적 대응」의 모습도 보편적인 모습을 띠면서도 개별적인 특성을 지니게 된다.
일본의 경우 예수회의 직접 선교에 의해 전파 수용됐다. 일본 교회는 핵심적인 교리 용어를 서양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이후 철저한 박해로 교회의 조직은 공식적으로 소멸되고 「가쿠레 기리시탄」으로 변형된 신앙 생활의 길을 걸으며 매우 특징적인 교회사를 전개했다. 중국 교회는 「보유론적(補儒論的) 전교 방침」에 의해 지식인 사회에 파고들었으며 천문 역법과 실용 과학 기술로 왕실에 봉사하며 전교할 수 있었다.
조선 교회는 자율적으로 신앙을 깨우친 평신도들만의 전교활동으로 놀라운 성장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다른 나라와 대비된다.
▷제1주제 : '일본에서의 기리시탄 박해의 역사성' - 고노이 다카시(일본 동경대학 교수)
박해 이용 막번체제 유지
일본 그리스도교는 전근대와 근대를 막론하고 늘 박해의 대상이었다. 일본에서 그리스도교 박해는 가고시마에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선교하던 1570년경까지 약 20년 사이에 그 기반이 거의 형성됐다.
초기 반그리스도교 사상은 가고시마와 야마구치에서 불승(佛僧)과 재가 불교 신자들에 의해 주도됐다. 이들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정치불안을 야기하고 사원을 파괴해 사회 불안을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1560년대 후기 이후 일반에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반그리스도교 사상의 골격을 이뤘다. 또 일본의 신을 비롯한 황실의 조상신에까지 이어진 비판은 천황과 공가(公家)의 강한 반발을 초래했다.
아울러 그리스도교의 윤리관으로 16세기 이후 사회적으로 우선시됐던 불교적 가치관이 부정되며 사회 질서를 밑바닥에서부터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성이 부각됐다. 이로 인해 천주교는 전근대 일본의 통일 달성을 위한 「금교」로 이용당하다 이후에는 서양의 침략을 위한 종교로 간주돼 막번(幕藩) 체제의 확립과 유지 차원에서 '금교'로 변질됐다.
이같이 그리스도교 박해 정책은 정치·사상적으로 막번 체제의 확립과 존속에 매우 큰 역할을 했으나 참혹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속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제2주제 : 청초 대 천주교 정책의 변천 - 구웨이민(중국 화동사범대학 교수)
강희제는 관대 옹정제는 반대
명나라와 청나라가 교체되는 격변기에 중국 교회는 한 시기 순탄한 발전을 할 수 있었다. 청초 강희제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서학을 전파하는 데 매우 관대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는 건국 초기 청 조정이 외래의 문화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할 여유가 있었으며 천주교에 대해 확정된 정책을 입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강희제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청 조정과 교황청간에 「예의지쟁」이 발생하면서 중국 교회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어 등극한 옹정제는 천주교를 국가 안위를 위협하는 잠재 세력으로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힌다.
또한 중국 교회와 국가간의 관계는 황제와 선교사의 개인 관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정치적인 알력에 휩싸일 위험을 안고 있었으며 이는 현실화되기도 했다.
▷제3주제 : 신유박해의 배경과 성격 - 서종태(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 연구원)
천주교 및 개혁 세력 제거 목적
신유박해를 계기로 탕평정치에서 세도정치로 전환되어 갔다는 점에서 신유박해는 정치사적으로도 매우 주목되는 사건이다. 노론 벽파가 신유박해를 단행한 데에는 천주교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뿐 아니라 자신들에게 불리한 개혁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도 크게 작용했다. 정조는 자신의 개혁 정치를 보필할 수 있는 인물로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을 비롯한 성호학파의 양명학자들을 중용했다. 이들이 주축이 된 일련의 개혁들은 노론 벌열(閥閱 장기 집권 가문)들의 이익에 반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심대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것이어서 신유박해는 불리한 개혁을 원상태로 되돌리려는 측면이 강했다.
이 과정에서 남인 공서파가 천주교 배척에 가담한 것은 1787년 정미반회사건 때부터였으며 이는 정조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던 채제공에게 정치적 타격을 가해 그의 중용을 막고자 하는 노론 벽파의 사주로 인한 것이다. 이같은 공서파의 행위는 당시 불안했던 남인들의 정치적 입지와 깊은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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