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덕 주교님은 정말 훌륭한 인품을 지닌 존경스러운 분이셨습니다. 전교의 황금어장이라 불리는 군에서 사목하시던 시절, 대단한 열성과 노력으로 많은 젊은이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불러들였으며, 그렇게 만난 젊은이들에게 인간적인 따스함과 관심을 기울이시던 존경받는 사제이셨습니다. 또한 주교로 지내시면서도, 실로 주교님처럼 겸손하기도 쉽지 않을 만큼 사제들에게는 참으로 어질고 온유한 아버지요, 신자들에게는 참된 모범이셨던 분으로 모두가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현대의학으로도 어쩔 수 없었던 그 병고에 시달릴 때, 그 누구도 주교님께 어떠한 도움도 되어드리지 못한 것이, 생각하면 가슴 아릴 정도로 안타깝습니다.
주교님은 양떼를 돌보라고 교회의 목자로 세워지셨지만, 돌보아 주고자 하셨던 그 약자, 병자가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신비스럽게도,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 걸었던 그 내리막의 여정, 케노시스의 여정에 어느 누구보다도 가까이 동참하셨습니다. 약한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 몸소 약한 인간이 되셨던 분처럼, 주교님은 약한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몸소 체험하심으로써 실로 약자가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약한 이들, 낮추어진 이들만이 만날 수 있는 그리스도를 만나시고, 그분의 복음을 훨씬 더 깊이 이해하셨으리라고 믿습니다.
아마 서 주교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예수님처럼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라고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죄라고는 몰랐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을 통해서 복종하는 법을 배우셔야 했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제가 보기엔, 서주교님의 고통은 그분이 한평생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며 따랐던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과 닮았습니다. 그래서, 받아 들이기 힘들었을지라도, 평소에 굳건히 간직하셨던 믿음으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는 자세로, 주교님의 그 고통은 주님의 남은 수난을 당신의 몸으로 채우신 신비스런 고통으로, 구원의 고통으로 변화되었으리라 믿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같은 군종 신부로서 서주교님과 20여년을 참으로 가까이 살았던 동료였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주교직 수행에 있어서도 동료가 되었습니다. 이 동료의식 때문인지, 이 순간 저는 제 자신의 죽음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상기하게 됩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저 역시 틀림없이 오늘 서주교님처럼 육신의 생명을 떠나 하느님 면전에 서게될 것입니다. 그 때 제 온 삶이 하느님 앞에서 숨김없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주교님의 투병과 죽음은 우리들에게, 특히 동료 주교인 저에게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가르침으로 남아 있습니다. 나는 주교로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떠한 희망을 보여주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이 매섭고 예리한 물음을 저에게 구원의 선물로 남겨주신 듯합니다. 참으로 고맙고도 소중한 선물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주교로서 주님 안에서 어떻게 날마다 잘 죽어갈 수 있을 것인가? 주님 안에서 날마다 잘 죽는 삶을 산다면 제 죽음의 순간도 힘들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됩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리라 믿습니다.
잘 가십시오, 주교님. 주교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셨던 주님의 품에서 이제 평안히 쉬십시오. 영원한 안식을 누리십시오. 그리고 남아있는 우리를 위해서 전구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얼마 후에, 당신이 있는 그 곳에서 우리 다시 만납시다.
부산교구장 정명조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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