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정의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듯 이날 행사에는 이용훈 주교를 비롯한 성직·수도자와 정부 관계자 등 교회 안팎에서 200명이 넘는 이들이 참석해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본 ‘정의’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이용훈 주교는 이날 행사에서 인사말을 통해 “냉혹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협력과 상생보다는 경쟁만을 강요하는 현실은 처음부터 불리한 조건에서 출발한 약자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지 않는다”며 “교회는 정의에 대해 ‘사랑 안에서 완성돼야 한다’(사회교리 제206항)고 가르치는 만큼 우리 사회가 진정한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정의만으로는 부족하고 정의를 넘어서는 연대와 사랑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이 주교는 “정의에 대한 오늘 세미나가 부당하고 공정하지 않은 이 현실에 좀 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고민과 노력으로 변화되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주제 문구를 정한 박정우 신부(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총무)는 세미나 개최 취지에 대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받으면서 하느님께 돌려드릴 것은 돌려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유하고 반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세미나에 참가한 조희철(스테파노·서울 신내동본당) 씨는 “한국교회가 정의라는 가치를 대하는 모순점과 그 해결 방향을 동시에 보여주는 자리여서 의미가 컸다”며 “성경 해석만으로는 명확하지 않은 정의의 관념을 사회교리적 관점에서 기준을 정할 수 있는 자리였다”고 말했다.
▲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이용훈 주교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경청하고 있다.
- 주제발표 요약문 -
■ 성경과 사회교리 그리고 정의 - 박동호 신부(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 박동호 신부
사회교리와 관련된 교황 문헌들이 국내 신자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이유는 우선 번역상의 어려움을 들 수 있고 성직자들이 신자들과 사회교리를 매개로 소통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교회는 사회교리를 선포하기는 하지만 전하지 않고 교회가 전해도 신자들이 들으려 하지 않고 듣고도 흘려버리는 경향이 있다. 한국교회에서 사회교리는 사실 백지상태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데 이에 대한 책임은 교회 지도자와 사목자에게 있다고 봐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결합을 요구받고 있으며 이웃 사랑은 사회활동 곧 실천하는 정의를 통해 실현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모두 종교 지도자들과 신앙의 백성을 믿음과 실천의 통합에서 부르고 있다.
■ 한국사회의 정의‘들'과 법 - 김도균 교수(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 김도균 교수
한국사회의 심각하고 유형적인 불의를 간추려 보면 지배-예속 관계로 표현되는 권력의 불평등, 부동산 투기 불로소득과 정규직-비정규직으로 대별되는 소득 불평등, 출생이라는 우연한 요소에 의해 좌우되는 교육과 취업, 직장 내에서의 불평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선거로 재신임을 받는 정치인들과는 달리 관료나 법조인, 의료인 집단 등은 평생 그 지위가 보장되며 사회적 견제 장치가 약해 그들로 인해 야기되는 불의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사회가 불의해도 냉소주의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며 현실의 법은 더 순수한 법의 여망에 맞게 점진적으로 스스로를 바꾸어 간다는 확신을 지녀야 한다.
■ 정의는 어떻게 ‘정의’와 대결하는가? - 이진경 교수(연구공간 수유너머n 연구원)
▲ 이진경 교수
정의는 현실 속에서 법에 의거하면서도 법의 기계적 적용을 넘어서는 판사 등에 의해 작동된다. 행정가나 관료가 정의의 작동자일 수도 있다. 정의의 작동자들은 구체적 상황에 따라 매번 법을 새로이 재창설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법이 권력의 불의에 저항하는 이들을 처분, 처형하고 권력자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는 현실이기에 정의의 개념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는 듯하다.
공동토론 요약문
주제발표에 이어 진행된 공동토론에서는 김선실 운영위원(미리암 이주여성센터)이 ‘여성해방을 위한 숙고와 제안’이라는 주제를 들고 나와 “여성들에게 있어 정의란 가부장제에 의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며 그 근거는 여성도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존재라는 것과 정의의 원리인 동등한 인간 존엄성에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김 위원은 “호주제의 법적폐지가 상징성에 머물러 현실에서는 여성에게 뚜렷한 변화가 없었다”고 강조했다.
김형태 변호사(주교회의 정평위 사형제도폐지소위원회 운영위원장)는 ‘정의의 복합적 개념’에 대해 “성경적 관점만으로는 사형제도에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다”며 “세상만사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이뤄져 있어 무엇이 정의인지 규정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각 사람에게 그의 것을 주라’는 롤스의 정의론을 구체화하려면 각 개인이 처한 개별성에서 그의 몫을 추출하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다.
이어 한면희 교수(녹색대 서울 사회교육원장)는 ‘정의, 그리고 환경정의’를 주제로 “사회정의에서 발현돼 환경정의로 발전하는 여러 입장들은 환경정의에 부합하는 정도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며 “환경정의에 보다 잘 어울릴 수 있는 평등적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평화로운 사회는 정의의 열매다’로 토론을 벌인 황진선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은 “시장원리만으로는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기 어려운 계층이 반드시 존재하므로 정의로운 사회는 자유시장이 존중하지 않는 미덕과 공동선을 지향해야 한다”며 “그 핵심은 신약성경에 제시된 가난한 사람에 대한 우선적 배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