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바꾼 데레사 성녀의 책한 권
“신앙과 교회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실질적이며 적극적인 활동이 없는 평신도의 삶으로는 주님과 가까워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와는 달리 세속적인 환경에서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노력하는 평신도의 삶은 투철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쉽지 않은 조건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 치열한 현장에서 온전히 자신을 내어놓고 일생을 살아온 마산교구 통영 대건본당 제옥례(루갈다·97) 할머니를 만났다.
“타인을 위한 삶에 대해서 생각도 못해본 제가 대학시절 단짝이던 친구에게서 받은 소화데레사 성녀의 책 한권으로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충격적이었던 가톨릭 신앙과의 첫 만남은 193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따던 그해, 제씨는 일제강점기 금서정책으로 드러내놓고 볼 수 없었던 성녀의 전기를 가슴에 품고 화장실에서 몰래 읽었다고 설명한다.
“뜨거워지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어서,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명동성당을 찾았습니다. 수녀님에게 자신을 소개를 하고 교리를 받게 됐어요.”
세례를 받은 지 두 달 만에 그녀는 결국 수녀원에 입회하게 된다. 당시 프랑스어와 영어, 일본어를 구사하던 그녀였기에 수도원에서도 한국교회 선교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하면 신앙에 대한 깊이도 없이 덜컥 수녀원에 입회했어요. 하지만 몸이 약하고 병치레가 많아서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지역교회 위해 헌신적 봉사활동
1943년 요양을 위해 고향 통영에 내려온 제옥례씨는 성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봉사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 인생의 크나큰 변화를 일으킬 사건을 맞게 된다. 죽음을 앞둔 이에게 대세를 주기 위해 방문을 했는데 그 집의 부인이 8남매의 새어머니를 구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사방팔방을 찾아다니며 아이들을 보살펴 줄 수 있는 곳을 찾았지만 거절만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저를 수녀의 길로 인도해준 노기남 대주교님과 최민순 신부님께 어떡하면 좋을지 상담의 편지를 띄웠어요.”
‘수녀로 사는 것보다 어머니로 사는 것이 더 의미 있을 수 있다’는 답신이 도착하자 그녀는 굳은 결심을 하고 1945년 30세의 나이로 결혼을 하게 된다.
이후 자녀 둘을 더 낳고 10남매를 오롯이 키워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또 남편과 사별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수필가로 데뷔, 경향잡지에 발표하고 책을 내기도 했고 지역교회를 위해 봉사를 아끼지 않았다.
골골이 패인 주름의 숫자만큼이나 수많은 이들이 그녀로 말미암아 신앙을 배우고 인생을 배웠다. 그러기를 40여년 이제 그녀도 상수(上壽)를 바라보고 있다.
“제 별명이 성당 장돌뱅이입니다. 늘 성당 제대 앞자리에 앉아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신부님이 붙여주신 별명이지요. 하지만 저는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 못 다한 수도생활의 보속이라는 생각으로 주님께 더 정성껏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신앙상담하러 이웃 신자들 방문
열 평 남짓한 주공아파트에 거처하는 제옥례 할머니는 아직도 매주 두 번 성당에서 기도모임과 활동을 왕성히 하고 있다. 또 찾아오는 이는 누구나 반갑게 맞아주기에 신앙 상담을 위해 많은 이들이 방문하고 있다.
가진 것은 모두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직성이 풀리는 할머니, 내가 죽으면 십 원짜리 하나까지 모두 성당에 봉헌하라는 유언을 남긴 할머니, 끊임없는 기도와 모범으로 존경과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할머니, 그녀에게 있어 삶은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나눔의 삶 그 자체였다.
“가짐의 가치는 가질수록 적어지지만, 나눔의 가치는 나눌수록 많아집니다. 또 됨의 가치는 되면 될수록 경쟁이 심해지지만, 섬김의 가치는 섬기면 섬길수록 무한한 경지에 이릅니다.”
제옥례씨는 마지막으로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은 정체될 수밖에 없다고 충고한다.
“기쁠 때는 물론이거니와 어렵고 괴로울 때, 실망하고 좌절할 때라도 감사함은 하느님께서 다시 주실 은혜에 대해 감사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희망을 갖고 기쁘게 사십시오.”
오늘도 그녀는 여느 주일처럼 묵주와 지팡이를 움켜쥐고 한없이 기쁜 표정으로 성당을 향해 문을 나선다.
■ 프로필
제옥례 씨는 1915년 통영출생으로 통영초등학교와 진주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전남고흥초등학교 교사, 합천성모유치원 원장, 한국문인협회 통영지부장, 한국문화예술단체 통영지부장을 역임했다. 교황청 십자훈장과 한국예총예술문화 공로상, 경상남도 올해의 봉사상, 대한민국 여성복지 유공자 훈장 등을 수상했으며 「은총의 열매」, 「겨울 나그네」 등 다양한 수필집과 기고활동을 펼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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