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의 만남. 마냥 반가워하면 될 줄 알았는데, 손이라도 잡아주고 얼싸안기라도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조심스러울 줄이야….
대구대교구 민족화해후원회(회장=정만진, 지도=이상재 신부)가 주관한 「하나원」 교육생 초청 행사는 이렇게 조심스러운 가운데 시작됐다.
「하나원」은 북한이탈주민(탈북자)의 남한 사회 적응과 정착을 돕는 기관이다. 교육 기간은 2~3개월, 하루 이틀 민박하며 남한 사회와 가정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한다. 그동안 주로 개신교나 불교 측에서 주관해온 이 행사에 가톨릭이 처음 손을 내밀었다.
1박2일 일정으로 대구에 온 탈북 주민은 35명. 2월 26일 낮 12시 주교좌 계산성당 마당에 첫발을 내딛는 그들의 표정은 긴장감이 역력했다. 한국에 온 후 첫 장거리 여행에다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 민박에 대한 기대감과 부담감, 사선(死線)을 넘어온 유랑자의 막연한 불안감, 앞으로의 삶에 대한 불확신 등등이 겹쳐서일까? 편안하고 희망에 찬 여정만은 아니었다.
▲ “환영” 2월 26일 대구에 도착한 「하나원」교육생들. 점심식사에 앞서 간단한 환영식이 열리고 있다.
20대 초반에서부터 60대 초반까지 다양한 연령층만큼이나 이들의 관심도 다양했다. 가장 예민한 반응은 비싼 물가. 백화점 가격에 현기증이 난 듯 『싼데 가자』며 재래시장을 선호했고, 여기서도 깎아달라며 흥정하는 모습은 우리와 다를 바 없었다. 육교를 지날 때면 엎드려 있는 걸인을 보며 「남한에서도 노력하지 않으면 굶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한국 생활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며 입을 모으기도.
저녁에는 시내를 벗어나 한 자연농원을 찾았다. 농촌의 삶도 둘러보고 들뜬 마음을 가라앉힐 약간의 휴식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농원의 시설을 둘러보고 식당에 들어서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먼저 자리한 탈북자들이 노래방 기기 앞에 모여 노래와 춤을 즐기는 것이 아닌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긴장된 모습을 늦추지 않았던 그들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빼어난 노래 솜씨와 자연스러운 춤동작으로 긴장감을 허물고 있었다. 새삼 그들의 뛰어난 가무(歌舞)에 입을 다물지 못하던 봉사자들도 박수를 치며 합류, 어느새 「하나」가 되고 있었다.
▲ 농원 방문 저녁에는 시내를 벗어나 한 자연농원을 찾았다. 농원에서 사육하는 돼지를 구경하고 있다.
▲ 춤과 노래 빼어난 노래 솜씨와 자연스러운 춤동작으로 하루의 긴장감을 허물고 있다.
저녁 9시가 넘어 탈북자를 집으로 모시기 위해 약속 장소에 나타난 신자 봉사자들도 조심스러워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처음 맞는 귀한 손님이지만 워낙 오랜 세월동안 서로 다른 체제와 가치규범 속에서 살아온 탓에 본의 아닌 실수라도 저지를까 조마조마 한 것일까? 어쨌든 이들은 만나 반갑게 혹은 어색하게 악수를 나누며 숙소로 향했다.
# 민박 사례
20대 중반의 A씨(남)는 이번 대구 방문단 중에 가장 걱정되는 인물로 지목되면서 교회 측 관계자들이 예의주시하며 속앓이를 해야 했다.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중국이나 동남아, 시베리아 등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약 90% 정도가 개신교 목사의 도움을 받는다고. 그러다 보니 개신교 신자화 되다시피 해서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고 가톨릭에 대한 반감마저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가 많다. A씨 역시 하나원에서부터 가톨릭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으며 첫날 계산성당에 도착해 성모상을 보고서는 표정이 달라지며 시비를 걸어왔다.
A씨의 잠자리를 책임진 이는 정성길씨. 정씨는 가깝게 지내는 레지오 단원 한 명과 같이 A씨를 데리러 왔다. 첫 대면에 혼자서 버겁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웃한 신앙인들이 함께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A씨는 이 때의 상황을 『건장한 두 남자가 봉고(승합차)에 나를 태우고 어딘 가로 끌고 가는 것 같아 겁이 많이 났다』고 고백했다. 여전히 긴장감을 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 도착한 정성길씨와 레지오 단원 부부 그리고 A씨는 밤늦은 시간이었지만 조촐한 술상을 마주하고 이런 저런 일상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정씨는 특히 체제나 종교 문제에 있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느 곳에나 좋고 나쁜 점이 공존한다는 전제아래 가톨릭에서 성모님을 공경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니 A씨는 『고맙다』며 받아들였다. 특히 정씨 자신이 개종한 사례여서 자신의 경험담을 곁들인 이야기는 설득력있게 다가갔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지만 하나원에서의 규칙적인 생활 탓에 A씨는 새벽 6시가 되자 일어났다. 정씨는 살을 맞대고 싶은 마음에 A씨를 데리고 동네 목욕탕으로 갔다. 등을 밀어주고 이발까지 시켜준 다음 아침을 대접하고 집결장소로 데려주었다. 정성길씨는 A씨와 헤어지는 순간 그의 눈가에 맺힌 이슬을 볼수 있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헤어지는 시간. A씨는 우선 대구 민족화해후원회 관계자에게 「성모상 시비」에 대해 『죄송합니다』며 사과했다. 그리고는 하나원를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있는 수녀에게 다가가 『수녀님, 앞으로 저를 자주 보게 될 것입니다』며 씩 웃는 것이 아닌가. 교회 측 관계자들의 우려가 봄눈 녹듯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민박 다음날 아침, 탈북자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전날 굳어 있고, 경계를 풀지 못하던 모습은 다 사라지고 평화롭고 감사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민박 봉사자들과 『언니』『동생』하며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운 듯 출입구까지 따라나가 배웅했다. 이날 오전에는 대구의 주력 산업인 섬유공장을 방문, 염색 과정을 지켜봤다. 예상밖의 노동 강도, 기대 이하의 급여에 놀란 듯 다시 한번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다졌다.
▲ 염색 공장 견학 대구의 주력 산업인 섬유공장을 방문, 염색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힘든 일과와 기대 이하의 급여에 올라며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다졌다.
『어느 부모 형제가 이렇게 품어주고 고민을 들어주겠습니까. 천주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역시 우리 조선 민족의 피는 진하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열심히 사는 동포들을 보면서 함께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북한에서 탈출한 뒤 중국과 몽골을 전전하며 한시도 불안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말이 통하지 않아 힘들었는데 이렇게 따뜻하게 맞아 주니 내 민족 품이 최고라는 생각이 듭니다』
두고 온 가족 그리운 고향이 눈에 밟혀서 일까?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을 부르며 모두들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한 민박 봉사자는 『생각보다 탈북자가 많다는 것을 실감하게 됐지만, 한국으로 넘어오는 과정이나 정착하는 과정에 있어 우리 가톨릭의 역할이 너무나 미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며 아쉬워했다. 『가톨릭 교회가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탈북자들에게 정신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안정감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또 다른 봉사자의 깨달음이 이번 행사의 가장 큰 수확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