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겨울, 서울, 대한민국
잠자리에서 일어난 윤봉철(안드레아·43)씨는 습관적으로 텔레비전부터 켰다. 업계 순위 상위에 꼽히는 잡지사에 다니는 윤씨에게 TV를 통해 지난밤에 일어난 사건사고를 체크하는 일은 업무의 시작이나 다름없다.
이리저리 보도채널을 돌려대던 윤씨의 입에서는 같은 말이 몇 차례나 흘러나왔다.
“똑같군, 똑같아. 어쩜 이렇게 베낀 것처럼 같을까.”
한참이나 뉴스를 검색하던 윤씨는 지친 듯 리모컨을 내던지고 만다. 짜증이 묻어나는 윤씨의 생각은 또다시 10년 전으로 달려간다.
‘그때 제대로만 됐어도….’
이러저런 이유로 텔레비전과는 떼려야 뗄 수도 없는 윤씨가 말하는 10년 전 사건이란 2010년 12월 31일 4개의 종합편성채널(종편)이 선정된 일을 염두에 둔 것이다.
당시엔 윤씨도 공중파나 다름없는 종편이 많이 생기면 생길수록 재미있는 볼거리들이 많아져 시청자 입장에서는 미디어 환경이 더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동안은 그랬다.
공중파와 별 차이가 없는 종편 채널 4개가 늘어나면서 경쟁적으로 다양한 기획 프로그램들이 쏟아져 나왔다. 같은 취미나 화제로 온가족이 한 채널 앞에 모여 앉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텔레비전에서 재미 외에는 어떤 것도 찾아보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말 그대로 재미만 있다.
온가족이 모여 앉는 황금시간대에 함께 보기 민망한 소재나 주제를 다룬 장면들로 얼굴을 붉히며 채널을 돌려야 하는 상황이 조금씩 늘더니 지금은 아이들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는 것만 봐도 가슴이 벌렁거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제 아내는 아예 텔레비전을 없애버리자는 말까지 하는데 참 난감하다. ‘시청자 선택권’으로 포장한 채 텔레비전을 켜는 순간 눈을 떼기 힘들게 만드는 방송 환경은 자라나는 아이들의 인성이나 교육 문제로까지 비화하고 있는 것이다.
텔레비전을 꺼버린 윤씨가 이번엔 조간신문을 집어 들었지만 몇 장 넘기지도 않고 내던지고 만다. 어제 저녁 텔레비전 뉴스에서 들었던 소식을 오늘 아침 신문에서 다시 반복해서 봐야 한다는 사실에 기가 찰 노릇이다.
■ 요동치는 한국사회 미디어 지형
종편으로 인해 요동치고 있는 한국사회의 미디어 지형이 점입가경으로 빠져들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지난 2009년 한국방송광고공사(코바코)의 지상파 방송광고 판매대행 독점체제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뒤 2년 넘게 시장 질서를 규율할 새 미디어렙(방송광고판매대행사)과 관련한 대체 입법이 표류하고 있는 가운데 TV조선, jTBC, 채널A, MBN 등 종편 채널 4사는 이미 직접 광고 영업에 뛰어들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올해 말 개국 예정인 종편 채널들이 지상파 번호대와 인접한 15∼18번의 황금 채널을 장악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황금 채널은 시청률을 높이고 광고단가를 올리는데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이에 따라 방송 자체는 물론이고 전체 미디어 시장이 혼탁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종편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자사 신문을 이용하고 있다. 여론의 영향력이 동일한 조직에 과도하게 집중되는 현상이 빠르게 진행되며 미디어 생태계에 좋지 않은 결과를 낳고 있다.
이러한 현실로 인한 부조리와 고통은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전가될 판인데도 오히려 주무 부서인 방송통신위원회와 정치권은 무지막지한 식욕을 자랑하는 종편을 통제할 수 있는 미디어렙법 입법에 뒷짐을 지고 있다.
한시가 급한 사안임에도 종편의 미디어렙 포함 시기를 2∼3년 후로 유예시킬 것이라는 소리마저 나오고 있다.
이를 두고 정치권이 종편을 통해 내년 선거철에 득을 보려 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종편과의 유착관계 아래 이미지 정치 등을 통해 자신들의 생명을 더 유지하겠다는 철지난 사고를 하고 있다는 비판도 비등하고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한 문제는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게 번지고 있다. 종편에 이어 SBS와 MBC 등 지상파들도 뒤질세라 자사 미디어렙을 설립했거나 설립을 추진하며 직접 광고영업에 뛰어들 태세다.
SBS의 자회사인 SBS미디어홀딩스가 설립한 ‘미디어크리에이트’가 10일 ‘30대 광고 회사CEO 간담회’를 열어 2012년 1월 1일자로 광고독자영업을 하겠다고 선언하자 한국방송광고공사를 비롯해 언론학자와 시민단체 등의 반발이 확산되고 있다.
이들은 SBS의 방송광고 독자영업 선언은 종편의 미디어렙 체제 편입을 원천적으로 방해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실제 SBS와 같은 지상파가 광고 독자영업에 나서게 되면 종편의 미디어렙 편입 논의는 더 이상 진행될 여지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MBC까지 독자영업에 나서게 되면 미디어렙의 공익적인 측면은 붕괴될 게 뻔하다.
정부와 정치권이 손 놓고 있는 사이 무법상태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황에 한발 더 다가서는 셈이다.
하지만 이 정글과 같은 미디어 생태계에는 타잔 역할을 해야 할 지킴이도, 종편의 천적도 사라진 상황이어서 공멸의 기운이 빠르게 번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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