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교리교사가 어렵사리 건넨 말 한마디에 신부들의 가슴은 또다시 먹먹해졌다.
남수단의 겨울은 11월 건기와 함께 시작된다. 추수는 건기가 시작되기 전 끝났다. 하지만 수확량은 늘 턱없이 부족해 이 겨울을 넘기기 위해선 주린 배를 더욱 움켜잡아야 한다. 건기로 넘어가는 이 시기엔 곡식을 사기 위해 간간이 팔려고 내놓던 닭이나 염소 등도 찾아보기 어렵다. 집집마다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마지막까지 남겨둘 수 있는 유일한 먹거리가 가축들이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이곳에서는 하루 한 끼 때우듯 식사하는 것이 일상화돼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매주일 조금씩이나마 끊이지 않고 봉헌되는 예물들에 신부들의 눈길이 머문다. 꼬깃꼬깃 접어둔 1파운드(한화 300원가량) 지폐 한 장, 한 톨 한 톨 정성들여 말린 수수 한 움큼, 계란 한 알…. 어린아이들도 직접 봉헌할 마른장작 한 개비를 줍기 위해 종종 맨발로 초원을 내달린다.
비닐막사에 빼곡히 앉아 미사 참례
‘두다다다….’ 아침부터 표창연(프란치스코) 신부의 뛰는 소리가 요란하다. 주일학교 문 앞을 오가던 아이가 기어이 쓰러졌다. 또 말라리아인가. 단숨에 진료소로 옮겨 말라리아 감염 테스트부터 한다. 꽤나 능숙한 솜씨다. 치료약은 반으로 쪼개 포장해준다. 오랜 시간 굶어 독한 약을 감당할 몸무게와 체력을 갖추지 못한 어린아이였기 때문이다.
이번 주일, 표창연 신부는 성당 옆에 흙벽돌과 비닐로 지은 이른바 ‘강당’에서 초등부 주일학생들을 위한 미사를 주례했다. 200여 명의 어린이들은 어두침침한 비닐막사에 빼곡히 들어앉아서도 연신 신나는 표정이다. 제 키만한 장작개비를 끌고 아장아장 봉헌함 앞으로 향하는 꼬마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기까지 하다.
같은 시각, 성당에서는 한만삼(하느님의 요한) 신부를 반기는 신자들의 목소리가 더욱 요란하다. 한국 출장으로 두어 달 만에 만나게 된 ‘아부나’(Abuna, 딩카 부족어로 아버지, 신부)의 안부를 묻는 신자들이 한 신부를 겹겹이 둘러쌌다.
정지용(베드로) 신부는 일찌감치 수풀과 마른 진흙길을 헤치고 쉐벳 공소로 이동했다. 각 공소를 방문할 때면 으레 각종 약품과 간식거리, 교육 자료 등을 따로 챙기느라 더욱 분주하다. 쉐벳(Cueibet)은 본당 산하 공소 중 가장 신자 수가 많고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는 곳으로 매주일 신부가 찾아가 미사를 주례한다.
남수단 룸벡교구 아강그리알 본당(미션)은 한국에서 파견된 ‘피데이 도눔’ 신부들이 사목하면서 최근 새로운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이제 지역민들은 신자건 비신자건 누구나 신부들을 아버지로 대한다. 힘겹고 어려운 일들도 신부들에게 먼저 털어놓고 의논한다. 특히 신부들은 신자 개개인이 성사생활을 지속하고 나아가 자립을 위한 의식을 고양할 수 있도록 교육 등에 더욱 힘을 싣고 있다.
▲ 주일학교 청소년들이 본당에서 선물로 제공한 첫영성체 사진을 들여다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 주일미사 후 너나할 것 없이 신자들이 ‘아부나 존’(한만삼 신부)와 인사하려고 모여든다. 지체 장애를 가진 신자가 무릎으로 기어오자 한 신부가 먼저 다가가 몸을 낮췄다.
본당 미사 참례 인원만 400여 명
현재 매주일 본당 미사에 참례하는 인원은 400여 명, 회합에 참여하는 청년신자만도 150여 명을 넘어선다. 본당 출신 대신학생 2명과 소신학생 11명도 양성 중이다. 40여명의 교리교사들을 중심으로 35개 공소에서도 신앙생활의 맥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한국 신부들이 처음 진출한 4년여 전과 비교하면 상상을 넘어서는 변화다.
남수단 룸벡교구 아강그리알은 내전 피란민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형성된 마을이다. 비포장 도로에서조차 20여km 떨어진 숲속에 위치해 교회의 돌봄은 물론 기초 생활 지원조차 쉽잖은 지역이다. 한국 신부들은 콤보니 선교회가 처음 개척한 아강그리알 본당 공동사목자로 부임, 룸벡 초원 지대 복음화에 헌신 중이다.
▲ 아강그리알 지역 신자들은 아직 고해소를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다. 2011년 전례력의 마지막 토요일, 첫영성체 대상자들의 첫 고해가 있었다.
▲ 흙벽돌과 양철지붕으로 지탱하고 있는 작은 건물 외엔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쉐벳공소에서 한만삼 신부가 고해성사를 주고 있다.
▲ 주일학생들이 날마나 늘고 있지만 이들을 위한 별도의 미사 및 교리공간은 아직 갖추지 못했다. 한국 후원자들이 보내준 비닐과 그늘막으로 만든 이 공간이 어린이들을 위한 주일학교다.
희망과 절망 오가는 일상
하지만 이곳에서의 선교활동은 여전히 매일매일 희망과 절망을 오가는 일상이다.
신부들의 하루 일과는 강도 높은 노동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목적 돌봄만으로도 하루 해가 짧지만, 각 사목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우선 ‘살아남기 위한’ 노동에 매달려야 한다.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초원 지대에서 우물과 펌프를 갖추고 고장을 수리하며 유지하는 일만도 녹록잖다. 태양열을 이용해 전기 에너지를 직접 생산하는 일도 큰 부담이다. 또한 먹거리 부족 이상으로 힘겨운 것은 질병에 노출된 일과. 말라리아와 각종 풍토병은 물론 수십 가지 벌레들과 매일같이 실랑이를 벌여야 한다. 우기 몇 달간은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세차게 퍼붓는 비와 흙탕물, 또 건기 몇 달간 그늘조차 섭씨 40도를 훌쩍 넘게 하는 초원의 땡볕도 고스란히 견뎌내야 한다.
성당 유지, 보수는 물론 각종 사목시설을 짓고 운영하는 모든 활동 또한 세 명 신부들의 힘만으로 감당하고 있다. 각 분야 전문가가 아닌 신부들로서는 버거운 일들이 넘쳐나지만 외면할 수도 없다. 맡길 만한 사람도 찾기 어렵지만, 따로 비용을 지출할 만한 여력도 없기 때문이다.
▲ 대림 제1주일을 하루 앞둔 토요일, 본당 청년들이 새로운 회장과 총무를 뽑기 위해 한자리에 모여 회합을 열었다. 표창연 신부가 청년들을 격려하며 강복하고 있는 모습.
큰나무 그늘이 성당이자 회합 장소
그래도 아강그리알에는 시멘트 벽돌과 양철지붕으로 얼기설기 지은 성당이나마 갖춰져 있다. 사제들이 거주하며 각종 사목활동을 지원하는 콤파운드(Compound)도 한국 후원자들이 알음알음 지원해준 후원금으로 제법 숙식할만한 곳으로 다듬었다. 이에 비해 신자들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쉐벳공소의 성당은 쓰러져가기 직전이다. 공소사목을 위해 방문하는 신부들은 성당 한쪽에 벽을 세워 만든 제의실에서 스폰지 한 장을 깔고 자야 한다. 본당으로 승격시킬 시점이지만 아직은 요원한 바람일 뿐이다. 다른 공소에서는 그나마 쓰러져가는 초막도 찾기 어려울 때가 많다. 아직도 이곳 신자들에게는 큰 나무 그늘이 바로 성당이자 조배실이고, 회합 장소이다.
가장 희망적이지만, 매순간 절망감 또한 안고 가야하는 일정은 바로 ‘길’이 없는 초원을 헤치고 나가 신자들을 만나는 일이다. 숲속 오지에서 생활하는 공소신자들에게는 우물과 약품은 물론 교육을 도울 교사의 역할 등이 절실하다. 무엇보다 그들은 신부들이 자신들의 곁에서 함께 머물러주길 간절히 청하고 있다. 3명의 신부들이 힘을 합해 매일 빠듯한 시간을 쪼개 쓰지만 공소 신자들을 돌보기엔 역부족이다. 공소를 방문하고 돌아올 때마다 신부들의 마음은 안타까움은 커져만 간다. 지친 몸을 내려놓고 쉬고 싶지만 다시 초원을 헤쳐나갈 궁리에 하루 해가 저문다.
▲ 쉐벳공소 성당 제대 뒤편에 간이벽만 세워 만든 제의실 겸 사제 숙소.
※남수단 선교에 도움을 주실 분 : 신협 03227-12-004926 천주교 수원교구
문의 : 031-548-0581
■ ‘남수단 교회와의 인연은…’
수원교구 2008년부터 선교 사제들 파견
수원교구(교구장 이용훈 주교)는 2008년 ‘바오로의 해’를 맞아 한국교회에서 처음으로 수단(현재 남수단 공화국 Republic of South Sudan) 룸벡교구(Diocese of Rumbek)에 피데이 도눔 사제들을 파견했다. ‘피데이 도눔(Fidei Donum)’은 세계 각 지역 선교지 주교들의 요청에 의해 일정 기간 선교활동을 위해 파견된 교구의 재속 사제들을 일컫는다.
수원교구와 룸벡교구의 인연은 지난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연의 시작에는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소속 故 이태석 신부가 있었다. 당시 교구장 최덕기 주교는 이태석 신부를 통해 알게 된 수단 지역 선교활동을 후원, 룸벡교구장 시저 마쫄라리 주교(Caesar Mazzolari, 1937~2011)를 만나게 됐다. 마쫄라리 주교는 “그 누군가, 한국에서 활동하는 사제 1%라도 이곳의 활동을 도와준다면 크나큰 기쁨”이라며 사제 파견을 요청했고, 교구 사제들은 ‘그 누군가’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김태호·이승준·한만삼 신부는 교구가 해외 교포 사목이 아닌 현지 주민 사목을 위해 처음으로 파견한 사제들이었다. 현재는 2대 표창연·정지용 신부가 한만삼 신부와 함께 수단에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다.
▲ 한만삼·표창연·정지용 신부가 룸벡교구 신부들과 함께 지난 7월 18일 선종한 마쫄라리 주교 추모미사를 집전했던 모습. 사진-김민경 수원교구 해외선교부 평신도 봉사자
하지만 수단은 남과 북 수단의 이해상충, 종교로 인한 국론 분열, 경제 사정 악화, 특히 22년간 이어진 내전 등으로 심각한 고난을 겪어왔고, 교회 또한 이러한 어려움을 고스란히 품어 안아야 했다. 다행히 올해 7월 9일 남수단이 북수단과 갈라져 독립됨으로써 그나마 종교적 반복은 한결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새 정부의 행정과 치안은 불안하고 물가는 짐작키 어려울 정도로 높다.
남수단 교회는 총 10개 교구로 이뤄져 있다. 그 중 하나인 룸벡교구는 한국 국토의 2/3 크기이지만, 산하에 설립된 본당(미션)은 9개 뿐이다. 교구 내 본당 중에는 故 이태석 신부가 살레시오회 일원으로 활동하던 톤즈도 포함된다. 톤즈는 아강그리알에서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웃본당이다.
교구 관할 안에서 활동하는 사제 수는 29명이지만, 수단 출신 사제는 4명뿐이다. 특히 한국 피데이 도눔 사제들은 남수단 교회로서도 처음 맞이하는 해외의 ‘교구 사제’들이다. 이들은 여타 수도회와 달리 교구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어, 현재 룸벡교구 운영과 활성화에 큰 힘이 되고 있다는 평가다.
올해 7월 선종한 마쫄라리 주교를 대신해 교구장 직무대리직을 수행 중인 총대리 페르난도 콜룸보 신부(Fernando Columbo)는 “한국 사제들은 이곳에서 가톨릭교회의 보편적이고 하나인 공동체의 모범을 보여주고 형제애를 증거하고 있다”며 “수단 신자들의 믿음을 키우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는 이들에게 특별히 더 감사하며, 이들의 역할이 한국교회 신자들에게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