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라!(창세 12,19)”는 이 한 말씀을 가슴에 품고 길을 나섰다. 만성 관절염으로 제대로 걷기조차 어려운 70대 노인은 혼신의 힘을 다해 순교 성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길 위에서 주님을 만났고 기적을 체험했다.
지난 9월 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위원장 유흥식 주교)가 펴낸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에 실린 109개 코스를 첫 번째로 완주한 김윤배(판크라시오·72)씨 이야기다.
“처음에는 완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한 번 시작이라도 해 보자는 마음으로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등에는 배낭을 메고, 손에는 묵주를 들고 한 걸음씩 내딛다보니 이상하게도 용기가 생겼습니다. 마음 속에서 어떤 사명감 같은 것도 생겨났습니다.”
김씨는 ‘사명’에 대해 말했다. 책의 지도를 따라 가면서 전국 성지의 현실을 목도했고, 자신이 직접 길을 걸음으로써 성지 보존 및 개발과 순례 코스 보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한 것이다.
“지도를 보고 길을 찾아가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작은 표지판을 설치하면 성지를 찾기가 훨씬 수월했을 거라는 아쉬움이 드는 곳이 많았지요. 또 순례 확인 도장을 받기가 어려운 곳도 많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 순례코스를 완주해 더 많은 신자들이 조금 더 편안하게 순례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제 사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불편한 다리로 배낭을 메고 전국 성지를 도보로 순례하는 것이 힘들지 않았냐는 물음에 김씨는 “오히려 행복할 때가 많았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제일 기억에 남았던 순례는 부산교구 성지인 죽림굴을 순례했을 때예요. 배낭을 메고 비를 철철 맞으며 새벽 6시부터 4시간 동안 산길을 걸어갔어요. 인적도 없고, 쉬어갈 곳도 없는 그 길을 무릎에 파스를 붙여가며 걸었습니다. 고통을 참으며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아프던 다리 통증이 씻은 듯 없어지고, 온 몸이 가벼워졌어요. 감사기도를 드렸지요.”
김씨는 순교자의 길을 걷는다는 생각으로 매 순례에 임했다. 제주도 순례 때에는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고초를 겪었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을 기억하며 배편을 선택할 정도로 어려운 길을 자처했다.
“순례의 시간은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순례를 하면서 용감해졌고, 선교에 대한 자신감도 갖게 됐지요. 그리고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순교 성인들의 영성도 체험했어요. 바람이 있다면 더 많은 신자들이 성지 순례를 떠났으면 하는 것입니다. 저 같은 할아버지도 해낸 걸요. ‘떠나라’는 주님의 음성을 좇아 떠나신다면 주님께서 그 길의 동행자가 돼 주실 겁니다.”
9월 18일 첫 순례를 떠나 11월 10일 전국 성지순례를 마친 김씨는 12월 1일 한국교회 최초로 주교회의 국내이주사목위원회 유흥식 주교 명의의 축복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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