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무얼 먹고 살지?
남수단 원주민들을 만나 가장 묻고 싶은 질문이기도 했다.
남녀노소 누구나 처음 보는 낯선 이에게도 환한 웃음을 지어주는 딩카족(Dinka). 하루에 열두번을 만나도 늘 환하게 ‘치박 치박(Cibak, 안녕, 안녕하세요)’, ‘인 아뿌올 구옵(Yin apuol guop, 몸은 좀 어때요)?’하고 인사하는 이들의 친절을 핑계 삼아 식사 준비 시간이면, 이웃집을 기웃댔다. 이들의 전통가옥인 루악(Luak)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때는 대부분 저녁나절 한 번 뿐이었다. 마른 풀로 지붕만 얹어 만든 똑같이 생긴 부엌, 이곳에서 조리되는 음식재료도 거의 같았다. 조금의 수수가루 혹은 밀가루, 조금의 땅콩, 조금의 기름, 한줌의 채소가 전부였다. 염소나 닭 등의 고기는 큰 잔칫날에나 겨우 맛볼 수 있다.
갑자기 공소 방문 때마다 먹었던 염소와 닭고기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좀 덜 먹고 남겨뒀어야 했는데…. 공소 회장과 교리교사, 루악 밖에 올망졸망 모여 있던 어린아이들 모습이 지금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해졌다. 옛날 우리나라 공소를 방문한 신부들이 밥을 몇 술 뜨곤 남겼다는 일화까지 빠르게 머릿속을 스쳤다.
딩카족은 손님들이 방문하면 꼭 음식을 대접하는 관습이 있고 이것을 먹지 않으면 큰 결례가 된다는 말에, 기자는 공소 회장과 교리교사가 차려 낸 츄인(Cuin, 밀가루와 수수가루 등을 익혀 찐 음식)과 고기를 가장 먼저 먹어 치웠었다. 뒤늦게 후회막급.
게다가 어제 공소에 가기 전 본당 전교회장이 방목했던 강아지들 모습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더욱 속이 시리다. 어제 아강그리알본당 세 명의 신부들은 차마 입 밖으론 내지 못한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강아지 몇 마리를 숲속에 풀어놓기로 한 것. 키우던 개들이 연이어 새끼를 대여섯 마리씩 낳자, 더는 안 된다는 신자들의 재촉에 눈물을 머금고 묵인한 일이었다. 사람 먹을 것도 부족한데 개를 더 이상 먹여 키울 수는 없다는 게 이유였다.
다음 날 점심 시간, 식탁에 오른 빵껍질에 푸르스름한 곰팡이가 잔뜩 낀 것을 봤다. 하지만 썩은 게 아니라 곰팡이가 핀 정도는 그냥 먹는다는 말에 기자는 곰팡이를 슬쩍 떼어내고 입에 밀어 넣었다. 이곳에서 평소 먹는 음식들도 상해있기 일쑤다. 특히 한국에서 보내 준 음식들은 인스턴트푸드임에도 불구하고 컨테이너에서 몇 달, 또다시 뜨거운 태양 아래서 몇 달을 버티며 대부분 제 맛을 잃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소화하는 능력도 이곳 생활의 필수조건이었다.
딩카족은 유목민이라 소도 많이 키우는데 소고기를 좀 먹고 살면 안 되나 질문을 던지는데 ‘탕’하는 소음이 울렸다.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세 명의 신부들은 이구동성 대답한다.
“총소리예요.”
표창연 신부는 “음…. 어딘가를 맞춘 것이 아니라 바람을 가르는 소리였으니, 별 일은 없을 겁니다.” 이어지는 말은 더 무시무시하다. “사람이 맞았을 때는 총소리가 달라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숟가락을 드는 신부들에게서 총성이 오갔던 살벌한 싸움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여전히 진행형일 수 있는 사건들이었다. 또 다음 날엔 대낮부터 총성이 울렸다. 콤파운드 밖으론 취재를 나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아강그리알에서는 지난 6월에도 총격이 자행됐다. 8명이나 사망한 사건이었다. 뒤이어 무장한 목동들이 신부들이 생활하는 콤파운드 내에 난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자기네 소를 훔쳐가고 사람을 죽인 아갈족(Agar)들을 찾겠다는 곡족(Gok)들의 소행이었다. 콤파운드 직원들과 경찰, 마을추장까지 나서서 말렸지만 이들은 총과 칼, 창, 화살 등 갖은 무기를 앞세워 주방과 진료소, 컨테이너, 사제들의 방까지 뒤져댔다. 결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이성을 잃은 폭도들에게 대화가 통할 리 만무했다. 4월에도 곡족과 아갈족 사이의 총격으로 3명이 사망하고 난민이 1800여 명이나 발생했다. 바로 지난 10월에도 곡족 목동 1명이 군인에 의해 사살되는 유혈사태가 있었다.
지난해 2월 아강그리알 본당 관할 쉐벳(Cueibet) 마을에선 거의 전쟁과 같은 총격전도 발발한 바 있다. 그것도 대낮 마을 한복판에서 말이다. 당시 군인 9명과 지역주민 17명이 숨졌다. 더욱 끔찍했던 현실은 이 총격전이 바로 쉐벳공소를 바리케이드 삼아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룸벡교구 연수를 마치고 공소부터 들렀던 한만삼 신부는 소신학생들과 함께 미처 공소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갇혔다. 귀를 멍멍하게 만들며 쏟아져 내리는 총탄 사이에서 하루를 꼬박 버텨야 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자신들의 추장을 해한 군인들에게 동태복수(同態復讐)를 하기 위해 마을의 모든 목동들이 총을 들고 나서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21세기에 서부활극 같은 총격전이 일어나다니, 믿기지 않는 현실 속에서도 한 신부는 주민들 걱정이 태산이었다. 2박3일 내내 이어지던 교전은 기어이 주민들의 삶터를 잿더미로 만들어놓고야 끝이 났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근본적인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소’때문이다.
딩카족은 남수단에서 가장 큰 규모를 이루며 살고 있는 유목민족이다. 이들은 종교와 언어, 문화 등을 중심으로 각기 다른 독립부족이 나뉘는데, 특히 곡족과 아갈족은 소로 인한 분쟁으로 끊임없이 엎치락뒤치락 싸워왔다.
딩카족에게 소는 가장 큰 재산으로 삶에서 절대적인 가치를 차지한다. 이들은 사람의 가치도 ‘소 몇 마리’식으로 매긴다. 누군가에게 손해를 끼쳐도, 심지어 목숨을 해친 경우에도 소를 지불하고 끝낸다. 혼인을 위해서도 소를 주고 여자를 사온다. 집안에서 가장 똑똑한 자녀는 어릴 때부터 목동으로 키운다. 평생을 ‘소’만 키우고 기초교육도 받지 못한 이들은 삶의 전부를 ‘소’에게 걸고, ‘소’때문에 더욱 폭력적이 된다.
이들에게 무한 애정을 보이는 신부들조차도 너무나 생소한 문화와 관습의 ‘차이’와 사고의 ‘다름’을 인정하는데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다.
소가 아니면 아무것도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알려주고, 친교를 나누도록 돕는 것은 쉽잖은 여정이다. 무엇보다 올바른 성사생활을 하도록 이끄는 데에는 겹겹이 장애물이 이어진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희망의 불씨는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고 있었다. 지역 곳곳에서 생활하던 교리교사들은 북수단 이슬람의 종교적 탄압에도, 내전에도, 부족 간 끊임없는 분쟁 속에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지켜왔다. 자발적인 신앙은 특별한 시대적 사명과 역할을 하는데 불쏘시개가 됐다. 이 때문에 현재 한국 피데이 도눔(Fidei Donum) 사제들을 비롯해 룸벡교구는 교리교사 교육과 양성에 큰 힘을 싣고 있다.
현재 남수단에서 신앙의 불씨를 새로 일으키고 있는 한국 신부들은 남수단 신자들 사이에서 또한 남수단과 한국교회 사이에서 형제애를 나눌 수 있는 다리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의 의식을 개선할 수 있는 지속적인 교육 방안 마련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오로지 메마른 목초지와 소만 보며 자라는 이들, 어두움에 익숙해진 이들의 눈망울이 보다 밝은 미래를 볼 수 있게 도울 방법을 말이다.
※남수단 선교에 도움 주실 분 : 신협 03227-12-004926 천주교 수원교구
문의 : 031-548-0581
특집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