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너 살짜리 꼬마아이는 이를 꽉 물고 고개만 끄덕인다. 눈물은 애써 참아보지만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는 막을 방법이 없다. 한만삼 신부가 아이의 다리를 자신의 무릎에 올리고, 이물질부터 걷어냈다. 소독약으로 상처를 닦아내자 뼈가 드러날 만큼 깊은 상처가 드러났다.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 치료도 받지 못한 상황에 한숨만 연거푸 나왔다. 한국에서는 외과병원에서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상처다. 하지만 이곳 남수단에서는 작은 상처에서 시작된 2차 감염으로 인해 속수무책으로 생명까지 잃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이곳 아이들의 발은 크고 작은 상처투성이다. 매일 험한 초원에서 놀거나 물을 길으러 먼 길을 오가다보면 다치기 일쑤다. 신발 한 켤레 가져보지 못한 현실은 여기저기서 절뚝대며 걷는 아이들을 만들고 있었다.
아강그리알 마을 시장으로 나갔다. 약국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약국’이라는 곳에서는 페니실린과 일반 진통제를 말라리아약이라고 우기며 팔고 있었다. 그나마도 먼지 쌓인 두 가지 약품 외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약국이었다.
남수단 룸벡교구 아강그리알 본당이 운영하는 자그마한 진료소. 철제 캐비닛에 플라스틱 의자 몇 개만 있는 천막 진료소지만 지역민들에게는 그 어떤 곳보다 귀한 공간이다. 이 문 앞에는 매일같이 30~40명의 환자들이 진을 친다. 많은 날엔 100여 명 이상 몰려들어 줄 세우는 데만도 꽤 공을 들여야 한다. 매일 오후 5시면 한국인 신부들은 아킴(Akim, 딩카어로 의사)이 된다. 이후 두어 시간 동안은 숨 돌릴 틈 없이 손도 마음도 바쁘기만 하다. 남수단에 파견되기 전 대학병원에서 익힌 응급처치법 등을 총동원해 집중하는 시간이다. 다행히 지난 10월부터는 한국인 간호사인 윤선혜(30·뻬르뻬뚜아)씨가 자원봉사자로 파견돼 의료봉사에 큰 힘이 되고 있다.
전문적인 의료 혜택을 거의 받아보지 못한 현지인들에게 약간의 소독약과 상처연고, 항생제 한 알은 그 어떤 명약보다 큰 효과를 보인다. 이 때문에 성당을 정비한 후 신부들은 가장 먼저 의료봉사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한국 신자들이 후원해준 약품은 많은 지역민들의 웃음을 되찾아줬다. 하지만 응급처치만으로는 이들의 건강상태를 호전시키기엔 역부족이다. 게다가 성당 인근 마을 외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몇 달씩 신부들이 방문해주기만을 기다리는 일이 허다하다. 현재 신부들은 각자 공소를 방문할 때마다 응급처치를 실시하고 어린아이들에게 구충제와 말라리아 예방약을 먹인다.
“공소 신자들과 만나면 가난에 허덕이는 아강그리알 주민들의 삶조차 ‘상대적으로는 얼마나 큰 혜택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나마 그들에게는 긴급한 일이 있을 때 최소한의 도움이라도 줄 수 있는 신부와 수도자들이 곁에 있으니까요. 그러나 숲 속 신자들과 지역민들은 응급상황조차 그냥 지켜봐야 할 때가 많습니다. 아직 우물조차 없는 오지마을 주민들의 위생 상태는 더욱 나쁘고 생활의 어려움도 크지요.”
공소 방문을 하고 돌아오는 길, 정지용 신부가 토로한 말이다.
현지인들은 평소 기초적인 정수과정도 거치지 못한 희뿌연 우물물을 마신다. 기생충은 물론 각종 질병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다는 말이다. 그나마 비정부기구(NGO)들이 파 준 우물도 대부분 펌프 고장으로 무용지물이 되어 있거나 우물이 없는 마을도 부지기수다. UN 통계 자료에 따르면 남수단 인구의 절반 이상이 30분 이상 걸어 물을 구하러 다니는 지역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신부들은 공소 방문을 할 때마다 우물을 좀 파달라고 하소연하는 신자들을 남겨두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게다가 최근 쉐벳공소 인근에 있던 NGO 운영 진료소조차 조만간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본당으로도 전해졌다. 본당 반경 수십 km 내에서 유일하게 기초 진료를 제공하는 ‘병원’이었다. 이곳이 문을 닫으면 지역민들의 고통은 더욱 커질 것이 불 보듯 뻔한 일. 현지에서는 많은 이들이 아강그리알 본당에서 이 진료소를 인수해 대신 운영해주길 바라지만 본당 운영기금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다. 본당도 지금으로선 관할 구역 내 극빈자들을 돌보는 것 외에 시급한 의료, 교육, 지역 사회복지 등 어떠한 부분에도 힘을 싣기엔 역부족이다. 임시 진료소 운영과 약간의 임금을 제공하며 그때그때 임시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조차도 신부들의 희생 없이는 어렵다. 이 또한 한국 신자들이 알음알음 모아 보내주는 후원금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수만 km 떨어진 곳에 사는 형제자매들이지만, 한국 신자들의 알음알음 보태주는 작은 정성들은 이곳 남수단인들의 희망을 지피는 불쏘시개가 되어주고 있다. 또한 한국인 사제들은 그 희망이 사그라지지 않고 커가도록 함께 살아간다. 하지만 이들의 영적인 면뿐 아니라 외적 삶의 자립 또한 돕기 위해서는 현지인들의 곁에서 함께 지내며 그들의 자립을 도와줄 각 분야 전문 봉사자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남은 것은 바로 우리의 몫이다.
▲ 해질녘, 아강그리알본당 관할 쉐벳공소 인근을 지나다 축구하는 청소년들을 먼발치에서 발견했다. 바람이 빠져 잘 튀지도 않는 공이었지만, 이 공으로 하는 축구가 이들에겐 평소 즐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스포츠다.
▲ 빤 아비에이 공소 미사 후, 그냥 보기에도 고개를 저을 만큼 희뿌옇고 이물질이 섞여 있는 물을 아이들은 저마다 먼저 먹겠다고 달려들어 꿀꺽꿀꺽 마시고 있었다. 그 이튿날 콤파운드 우물펌프를 수리하던 표창연 신부가 기자에게 말했다. “저희 우물물도 사진 속 물과 똑같아요.”
▲ 빤게우 공소 미사에 동행한 윤선혜 간호사가 초막성당으로 몰려든 환자들에게 약 복용법과 평소 주의할 점 등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진료소가 있는 지역까지 가려면 걸어서 며칠씩 걸리는 터라, 외진 숲속 주민들은 어지간한 아픔은 그냥 참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들은 오랜만에 만난 전문간호사가 그저 반갑기만 하다. 윤 간호사는 남수단 아강그리알 본당에 처음 파견된 평신도 간호 봉사자다.
▲ 남수단 피데이 도눔 신부들은 파견을 위한 준비 기간 중 대학병원에서 기본간호와 응급처치 등의 과정을 모두 수료한다. 특히 신부들은 오지 공소 방문을 나설때마다 미사도구 다음으로 각종 약품을 챙기기 바쁘다. 사진은 공소 아기들의 피부질환을 돌봐주고 있는 정지용 신부
▲ 아강그리알 성당 옆에 사는 리나 할머니가 말라리아와 감기를 앓는다는 소식에 가정진료에 나선 한만삼 신부
▲ 성당 앞에 쓰러진 아이를 일으키는 표창연 신부. 역시나 아이는 말라리아에 감염돼 있었다.
▲ 아강그리알 본당에서 공동사목을 펼치고 있는 한만삼·표창연·정지용 신부. 미사가 끝나면 어린아이부터 어르신들까지 모두가 신부들의 곁에 몰려들어 이것저것 이야기하기 바쁘다. 서로 딩카어와 영어를 섞어 쓰느라 대화가 어려울 법도 한데 이들의 만남은 언제나 즐겁다. (위쪽 세 사진)
에필로그
“우리들에겐 아주 작은 것이 그들에겐 큰 힘과 꿈이 됩니다.”
피데이 도눔 사제들이 이은 다리 덕분에 한국교회와 남수단교회가 인연을 맺은 지 4년째 들어섰다. 전 세계적으로 최빈국으로 꼽히는 남수단에서는 가톨릭교회 역시 해외 원조로 하루하루를 버텨가고 있다. 한국 피데이 도눔 사제들이 파견된 룸벡교구 또한 극심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4년여 간 한국인 신부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사목시설을 확충하고 신자 현황과 생활 실태 등을 파악, 본당 내외적 모습을 재정비하는데 혼신을 다해왔다. 모든 일과가 ‘새로운 도전’이었지만, 이 매순간순간은 지역신자들이 신앙을 회복하는 밑거름이 됐다.
“삶과 신앙의 괴리가 너무 큰 모습에 이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깊이 고민한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하지만 함께 살아가면서 이들 안에 복음의 씨앗이 죽지 않았음을 발견했습니다. 이들은 환경적 조건으로 인해 잘 배우지 못하고 신앙을 정화할 기회를 갖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 복음의 씨앗이 큰 나무로 자라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돕는 것도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남수단에서 본격적인 공동사목에 나선 지 6개월 남짓, 그 시간 동안 표창연 신부가 가장 절실히 묵상한 바다.
정지용 신부는 “이곳에서 함께 생활함으로써 삶의 연대와 나눔을 실제 느낄 수 있는 가족이 됐다”며 “이러한 연대는 단지 한쪽만을 돕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각자의 모습을 성찰하고 보다 새롭게 복음화되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역설했다.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고 싶지만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잡을 물고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는 물길을 새로 내고 물고기를 키울 수 있는 상황부터 개척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의 손을 잡아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이 초대에 응하는 작은 마음들이 바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특히 4년째 남수단에서 선교활동을 해온 한만삼 신부는 “물질적 지원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웃에 대한 관심과 지속적으로 이들과 맞닿을 ‘손’”이라고 토로한다.
남수단 현지 교구 사제로는 처음 파견됐다는 부담감을 딛고, 한국 피데이 도눔 사제들은 새로운 연대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넘긴 전례력, 지금 남수단에서도 새로운 회개와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곳에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남수단 선교에 도움 주실 분 : 신협 03227-12-004926 천주교 수원교구
문의 : 031-548-05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