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등 시복시성 대상에 포함된 이 가운데 김기량(펠릭스 베드로) 순교자가 있다.
‘제주’와 인연이 깊은 이 순교자는 1816년 제주 섬 함덕리의 중인 집안에서 출생했으며, 배를 타고 다니며 장사를 했다. 1857년 2월 18일 동료들과 함께 무역을 위해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된 그는 중국의 광동 해역에서 영국 배에 의해 구조됐다.
동료들은 탈진해 죽은 상태라 그는 홀로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내졌으며, 이곳에서 프랑스 선교사와 조선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난다. 그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기도문을 외우며 김기량의 신앙심은 날로 깊어졌으며, 1857년 세례를 받고 조선으로 귀국, 제주로 내려가기 전 페롱 신부와 최양업 신부 등을 만났다. 이들은 김기량이 ‘제주의 사도’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김기량은 가족과 그의 사공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데 열중했으며, 육지로 나와 교구장 성 베르뇌 주교를 만나 성사를 받기도 했다. 또 섬과 육지를 오가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그는 1865년 두 번째로 난파당해 일본 나가사키에서 프티장 신부를 만나고 귀국하기도 했다.
김기량은 육지로 나와 리델 신부에게 자신의 사공 2명을 영세시키기도 했으며, 이 무렵 천주가사를 지어 부르며 신앙의 의지를 깊이 다졌다고 한다. 그가 부르던 천주가사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어와 벗님들아 순교의 길로 나아가세. 그러나 순교의 길로 나아가기는 어렵다네. 나의 평생 소원은 천주와 성모마리아를 섬기는 것이요,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당뿐이로다. 펠릭스 베드로는 능히 주님 대전에 오르기를 바라옵나이다.”
하지만 ‘제주의 복음화’를 위한 그의 이 같은 노력은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무역을 위해 경상도 통영에 갔다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체포됐고, 통영 관아에 끌려간 그에게 혹독한 매질과 고문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1867년 1월, 매질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숨이 붙어있자 통영관장은 김기량을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하는데, 당시 그의 나이 51세였다. ‘병인치명사적’은 강 마리아의 증언을 통해 당시 통영관장이 특별히 김기량의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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